한겨레21 역사속의 여성

봉건의 굴레 벗어난 교육사업가 박인덕

1931년 늦가을 종교계와 여성계는 떠들썩했다. 이화학당 교사를 지내고 여성계몽운동에 앞장서 온 박인덕이 “가정을 떠나 사회로”를 선언하며 이혼을 한 때문이었다. 서른다섯살의 지식인 여성이 공개적으로 가정을 박차고 나온 것이다.

박인덕은 당시 종교계와 여성계의 떠오르는 별이었다. 이화학당을 나온 박인덕은 모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3·1만세운동 때는 학생선동자로 지목 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감 뒤에는 교육을 통한 애국심 고취, 강연과 문필활동을 통한 여성계몽 및 여권신장에 앞장섰다. 미국해 유학하여 웨슬리언대와 컬럼비아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지식인 여성으로 서 당당한 경력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박인덕 은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곧 부잣집 아들 김운호와 결혼하여 딸 둘을 낳았 다. 남편이 파산하자 박인덕은 가정교사로 혹은 학교 교사로 생활을 꾸려 야 했다. 서울 아현동 그의 집에서는 남자의 매질 소리와 여자의 비명이 흘러나오곤 했다. 결국 박인덕은 어린 딸들을 남겨둔 채 미국 유학을 떠 난다. 미국에서 그는 스스로 학비를 벌어 공부하는 한편 두고온 아이들에 게 생활비를 부쳐주었다.

1931년 10월 귀국한 박인덕은 한달만에 이혼을 감행했다. “사랑없는 가 정,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을 따라 한몸을 묻어버릴 수없고, 무지 한 남편을 부양하는 데 일생을 허비할 수도 없으며, 배운 지식과 능력으 로 일생을 사회사업에 바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박인덕이 그간 쌓아 온 명성과 영향력이 적지 않았으므로 그의 이혼은 장안의 화젯거리가 됐 고 찬반양론이 벌어졌다. 당시 ‘박인덕 여사의 이혼에 대한 사회적 비판 ’이란 제목으로 한 잡지에 실린 지상토론을 보자.

“이혼은 불가합니다. …. 간음죄 이외에는 이혼을 불허하게 되어 있습니 다. …. 물론 장래 활동에도 악영향이 있을 것입니다. …. 기성 종교단체 안에 들어와서는 활동할 수가 없게 되겠으므로….”(조선감리교회 총리사 양주삼)

“당분간은 선두에 나서지 말고 숨어 있어서 근신하는 것이 가하겠고…. 만약 재혼하면 그것은 음행이니까 교회로서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 입니다.”(조선주일학교연합회 회장 김창준)

“이혼이니 결혼이니 당사자끼리 하는 일을 남이 이렇다 저렇다 시비할 수 없겠지요.”(동아일보사 이청전)

“도시 모를 일.”(이화전문학교 이온상)

지상토론은 박인덕을 가리켜 ‘조선의 현대적 노라’라 하면서 “그의 앞 길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가?”라고 의문부호로 끝난다.

당시 신여성이라 불린, 신학문을 교육받은 여성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는 남편이나 가족과의 불화, 이혼같은 아픔을 겪어야 했다. ‘삼종지도에 충 실한 현모양처’라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사회활 동에 적극 뛰어들고자 한 이들이 걸어야 했던 가시밭길이었다. 그런 뜻에 서 박인덕보다 두살 아래로 역시 이화학당, 웨슬리언대, 컬럼비아대를 거 쳐 이화전문 교장이 된 김활란이 평생 독신으로 지낸 사실은 음미해볼 여 지가 있다. 여자에게 결혼과 일은 정녕 잡기 힘든 두마리 토끼인가.

이혼 뒤 박인덕은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다. 국내에서는 교육사업, 특히 실업교육에 힘을 기울여 인덕실업학교를 세우고 1980년 세상을 떴다.

박은봉/역사연구가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11일 제 1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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