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초점

전·노 사면 서명운동으로 여론몰이

(사진/역사의 심판은 벌써 끝나는가. 대선을 앞두고 영남권 표를 의식해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논의가 활발하다.)

8월15일 광복절을 앞두고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문제가 사 회적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5·18과 12·12사건으로 지난 4월17일 대 법원에서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을 확정판결받은 두 전직 대통령의 특별사면을 요구하는 청원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이에 반발하는 시민·사회 단체와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이다. 이 논란의 배경에는 12월 대선을 의식 한 정치권의 표계산도 한몫하고 있다.


불교 구세력, 도민회 등 서명운동 주도

재경 대구·경북도민회(회장 엄삼탁)는 지난 7월26일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 특별사면 청원을 위한 가두서명운동 발대식을 갖고 활동에 들 어갔다. 이들은 오는 8월10일까지 1백만명의 서명을 받아 청와대에 사면 을 청원할 계획이다. 현재 대구·경북지역 23개 전 시군과 서울·경기지 역에 거주하는 2백50만 대구·경북 출신자를 대상으로 벌이고 있는 이 작 업은 조직적으로 매우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다. 향우회와 부녀회, 청년회 는 물론 일부지역에서는 동장들이 집집마다 방문해 서명을 받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간단하다.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후세에 맡기고 국민대화 합 차원에서 용서하자는 것이다. 도민회 최성해 사무국장은 “이미 준엄 한 법의 심판이 있었고 1년6개월의 옥살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 과오는 단죄받아야 마땅하지만 국가발전에 기여한 부분도 인정돼야 한다 ”는 것이다.

지난 5월부터 시작된 불교계의 사면 청원운동은 이미 상당한 규모에 이르 렀다. 대구 동화사를 중심으로 시작된 서명운동은 대구·경북지역의 주요 사찰은 물론 조계사까지 확산됐다. 지난 7월18일에는 2백79만명의 불자가 서명한 사면청원서를 청와대에 전달하기도 했다. 서명운동을 주도하고 있 는 동화사 무공 스님 등은 “자비와 화합은 불교정신”이라는 명분을 내 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불교계 전체에 많은 문제점을 던지고 있다.

먼저 이번 청원운동이 사실상 두 전직 대통령의 친인척들의 요청에 따라 과거 그들과 친분이 있는 사찰과 스님, 신도회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데 마치 불교계 전체의 의사처럼 왜곡되고 있다는 것이다. 조계종의 한 스님은 “몇몇 사찰을 중심으로 법회 등을 통해 비공개적으로 진행된 서 명운동이 마치 불교계 전체가 전·노씨의 사면을 바라는 것처럼 비쳐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 불교계에서는 전씨가 백담사에 머물 당시 주지 였던 도후 스님과 노씨와 인연이 있는 대구 동화사의 무공 스님 등이 청 원운동을 주도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더욱이 서명 과정에서 불자들 사이에 “기독교도인 김영삼 대통령이 독실 한 불자인 두 대통령을 가뒀다”는 왜곡된 반발 심리까지 형성되고 있다 는 비판의 목소리도 들린다. 두 사람의 사면을 위해 현 정권에 대한 불교 계의 뿌리깊은 소외감과 배신감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불교계는 공식적인 입장 표명을 유보하 고 있다. 조계종의 또다른 한 스님은 “이번 서명운동이 지난 94년 3월 조계종 사태로 퇴진한 구 집행부가 현 조계종 개혁세력을 견제하고 대항 하는 한 방식으로 비쳐지면서 내부 갈등을 우려한 집행부가 이런 움직임 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을 회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불교신문사 최승천 부장은 “잘못된 것은 역사와 법의 심판을 받는 게 당 연하고 그대로 집행돼야 한다는 게 불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라며 현재 청원운동을 불교계의 입장으로 확대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전씨 가족 직원에까지 서명 동참 요구

또 전씨의 모교인 대구공고 동문회를 통해 적극적인 사면운동을 벌여온 전씨 가족들은 자신들이 운영하는 회사 직원들에게 서명운동 동참을 요구 해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최근 이들이 이렇게 전·노씨 사면 청원을 전개하는 것은 오는 8·15가 사면의 최적기라는 판단한 때문인 것으로 알려진다. 청와대를 비롯한 정 치권은 오는 12월17일 대선을 의식해 전·노씨 사면을 고민할 수밖에 없 을 것이고 그 경우 관례를 보아 10월3일 개천절보다 8·15 광복절을 선택 하리라는 계산인 것이다. 일종의 여론몰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대구·경 북도민회의 한 관계자도 “사면 시기는 우리가 결정할 것은 아니지만 빠 를수록 좋은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실제 사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정치권도 전·노사면이 가져올 손익을 저 울질하기 바쁘다.그 계산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 신한국당 내부에서는 이 미 “오는 12월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대선 전에 사면이 불가피하다”는 ‘사면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당 차원에서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을뿐 ‘반 김영삼 정서’가 팽배한 대구·경북 지역의 민심을 돌 리기 위해서는 사면이 필요하다는 분위기인 것이다.

이 대표를 적극적으로 밀었던 김윤환 고문은 “김 대통령이 적절한 시점 에서 두 전직 대통령을 사면해 과거청산문제를 매듭짓는 게 바람직하다” 며 거침없이 사면론을 주장해 왔고 이수성, 이한동 고문 등도 사면에 적 극적이었다.

하지만 사면을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해야 할 이회창 대표쪽은 아직 확실 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이 대표의 한 측근은 “사면할 수도 있 지만 당장은 어렵다”고 말꼬리를 흐렸다. 대구·경북 세력을 끌어안기 위해 사면은 필요하지만 이 대표가 직접 나섰을 때 닥칠 재야와 시민 단 체의 반발을 우려해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청와대가 직 접 나서 처리해 줬으면 하는 분위기다. 이 대표의 또다른 측근은 “최근 서명운동은 청와대의 사인을 받고 하는 게 아니겠냐”며 “대통령이 결자 해지 차원에서 결단을 내릴 것”이라고 말해 이런 속마음을 드러냈다.


국민회의 ‘먼저 사과’도 꼬리 감춰

(사진/사면반대서명운동. 재야와 시민단체들은 두 전직 대통령 사법처리가 국민적 호응 아래서 실시됐던 만큼 사면 논의는 중지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

신한국당이 이렇게 주춤하는 상황에서 국민회의쪽은 오히려 전·노씨 사 면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동안 국민회의쪽은 유보적이지만 국민적 합의가 있다면 수용할 수 있다는 양다리 전술을 펼쳐왔다. 김대중 총재도 “당사자들이 먼저 과거를 반성, 사과하고 국민사이에 용서하자는 분위기 가 조성되면 그때 가서 여론을 봐가며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만 밝혀 왔다.하지만 대구·경북의 민심을 얻어야 한다는 절박함에 직면한 김 총 재는 더이상 두 전직대통령의 사과를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사면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직접 뛰기 시작했다. 국민회의 광주시 지부장인 박 광태 의원을 통해 최근 광주지역 신부와 5·18 관련단체 관계자들을 화해 분위기로 유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재야·시민단체에 따르면 광주지역의 5·18 관련단체들은 곧 김 총재와 만나 “본인들이 사과, 반 성하면 용서할 수 있다”는 ‘용서의 입장’을 표명할 계획인 것으로 알 려진다. 이에 대해 국민회의 박지원 총재특보는 “이들 단체의 자발적인 움직임”이라며 사전 조정은 없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박 특보는 “당 으로서는 이런 일을 반대하지 않으며 한다면 좋은 일”이라고 말해 굳이 반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했다. 사면이 불가피하다면 정치적 부담 도 줄이면서 한몫 거드는 모습을 보여 표밭을 다지겠다는 입장인 것이다.

처음부터 전·노씨에 대한 사법처리 자체를 반대해온 자민련도 사면에 적 극적이다. “두 전직 대통령을 용서하자는 여론이 많아진다면 사면조치를 할 수도 있다”는 입장인 것이다. 특히 당내 대구·경북지역 출신 의원들 은 지구당별로 전·노씨 사면을 청원하는 작업을 끝낸 상태다. 이미 5천 명의 서명을 받아 청와대에 제출한 박철언 의원쪽은 “이제는 국민 대화 합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최종 결정권을 가진 청와대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대선전략 차원에서 사면이 필요하다는 신한국당의 압력은 느끼지만 이회창 대표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섣불리 나섰다가 김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만 커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면청원 운동을 통해 청와대가 여론의 추이를 살핀 뒤 결정을 할 것이라 는 분석이 유력하다. 김 대통령의 유일한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역사 바 로세우기’를 부인하는 사면청원 움직임에 대해 단한번의 언급도 없는 것 자체가 이들을 통해 여론의 향배를 재려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전·노 사면 국민적 저항 부를 것”

하지만 정치권과 청원운동 주도세력의 움직임과는 달리 대다수 재야·시 민단체들은 전·노씨 사면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사법 적 단죄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폭넓은 데도 여론을 호도해 역사를 뒤집 으려는 정략적 음모를 진행하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7 월18일부터 전·노사면 반대 서명을 벌여온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는 “해마다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한 8·15특사를 통해 부정부패 사 범에 대한 면죄부를 줘온 정부가 이번에는 전·노씨를 사면하려 한다면 다시한번 국민적 저항에 부닥칠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이들은 이런 ‘음모’를 막기 위해 오는 8월7일부터 삼청교육대 피해자 등 5·6공 피해자들과 함께 전·노사면을 반대하는 대규모 켐페인을 벌일 계획이다. 서울 명동에 신문고를 설치하고 사면반대를 호소하는 만민공동 회를 전국적으로 개최하며 국제사면위원회 등 국제인권단체들과 공동투쟁 도 모색한다는 것이다. 전국연합, 참여연대 등 14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 된 ‘5·18 완전해결과 정의실현을 위한 과거청산위원회’도 각당 대선 후보들에게 전·노사면에 대한 공개 질의서를 보내는 등 사면음모를 저지 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전·노를 어찌할 것인가.” 총칼을 앞세워 민중을 학살하고 역사를 짓 밝은 죄인을 풀어줄 수 없다는 시민사회단체와 국민화합을 내세운 세력 사이의 줄다리기가 뜨거운 여름을 더욱 달구고 있다.

신승근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14일 제 170호


커버스토리 포커스 문화시대 특집 지난호 전체보기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