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1997년06월19일 제 162호 한겨레21

대기근 외면한 영국의 참회

“1백50년 전 아일랜드 국민에게 죽음과 이민 사이의 선택을 강요한 대기 근은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비극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수많은 아일랜드 국민을 굶어죽게 한 영국의 행동은 진실로 잘못된 것이 었습니다.”

지난 5월31일 아일랜드 남부 항구도시 코크에서 열린 ‘아일랜드 대기근 행사’에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1백50년 전 영국의 잘못을 이렇게 사죄했다. 이는 당시 아일랜드 대기근 때 영국의 행동과 관련한 영국 총 리의 첫 사과였다.


경제논리 내세워 1백20만명 죽도록 방치

세계 기근지역 원조를 위한 아일랜드 민간단체 ‘고타’가 주최한 이 행 사는 1840년대 말의 ‘아일랜드 대기근’의 아픔을 기억하며 현재 기근상 황에 처한 나라를 돕자는 취지에서 열렸다. 모임 참석자들은 아일랜드 인 기배우 가브리엘 바이든이 대신 읽은 블레어 총리의 ‘사과문’에 박수로 서 응답했다. 열렬한 박수소리엔 이번 ‘사과’가 아일랜드인민군(IRA)의 테러 등으로 표현되는 영국인과 아일랜드인의 오랜 응어리가 풀리기를 바 라는 희망이 담겨 있었다.

192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아일랜드와 아직도 ‘독립을 꿈꾸는’ 북아 일랜드 사람들이 영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강한 반감의 뿌리가 1백50년 전 대기근 때 아일랜드인들을 굶어죽게 만든 영국의 식민통치에 있다는 것은 이미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는 내용이다.

지금부터 1백50여년 전인 1845년.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의 농민 들은 주식으로 삼았던 감자에 원인모를 병이 나돌면서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이때부터 수년간 감자 농사의 씨가 말라 버렸다. 그런데 영국인들 은 군대까지 동원해서 다른 작물들을 모조리 본국으로 가져갔다. 그후 불 과 5~6년 사이에 1백20만명이 넘는 아일랜드 사람들이 굶주림 속에 죽어 갔다.

죽은이들의 가슴 속에는 영국인 지주에 대한 처절한 원한이 담겨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결과는 여전히 영국땅인 북아일랜드 지방에서의 테러로 살아있는 것이다. 블레어 총리는 이 점도 순순히 시인했다.

“역사적 과오로 인해 오늘날 우리가 어떤 고통의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지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 세계 최고의 국력과 부를 누렸던 소위 ‘ 강대국 영국’ 이 한 일이 고작 무장한 군대를 앞세워 굶주리는 아일랜드 의 양식을 빼앗아 오는 일이었습니다. 이 참극의 역사적 교훈을 결코 잊 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실 아일랜드 감자기근은 19세기 유럽 역사를 바꾸어 놓을 정도의 큰 전 환점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또 기근 문제의 정확한 파악을 위해서는 ‘자연적인 현상’뿐 아니라 ‘정치경제학적 접근’의 필요성을 부각시켰 다. ‘대기근’의 시작과 끝에는 영국의 식민지배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 이다.

12세기부터 영국에 의해 지배되던 아일랜드에서 영국인 지배계급에 의한 토지소유가 완료된 것은 1830년께였다. 당연히 아일랜드 농민들은 자신의 땅에서 영세한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이들 아일랜드 소작농들의 주 식량 원은 ‘쓸모 없는’습기찬 땅에서도 잘 자라는 감자였다. 당시 수준으로 1에이커당 5t 이상의 감자가 산출되면서 감자에 대한 의존이 늘어났고 아 일랜드 인구도 증가했다. 19세기초 4백만이었던 인구가 1841년에는 그 배 가 될 정도였다.

대재앙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대재앙을 만든 것은 결코 자연적인 힘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감자 이외의 다른 작물은 풍년이었기 때 문이다. 물론 감자의 경작면적이 전체 농지의 1/3에 이르렀기 때문에 다 른 작물의 풍작이 기근 해소에 큰 도움이 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 게 감자 단일경작을 강요한 사람은 바로 영국인 지주였다. 게다가 영국인 은 감자 이외의 작물이 아일랜드인의 먹거리로 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 았다. 영국인 지주로서는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이었다. ‘정당 한’ 재산권 행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토지는 정당하게 획득된 게 아니었다. 군사력을 앞세워 강탈하다시피 한 것이었다.

한편 영국인들은 대기근이 정치 사회적 문제로 제기되자 탁상공론의 경제 논리와 원칙만을 되풀이하면서 ‘인도적인’ 차원의 접근마저 미뤘다.

그동안 아일랜드인들은 병든 감자 줄기처럼 쓰러졌다. 기근이 가장 극성 을 부렸던 1847년 아일랜드를 방문했던 한 영국인은 이렇게 쓰고 있다. " 땅바다에 버려진 시신을 개가 뜯고, 너무 쇠약해져 소리 지를 힘도 없는 사람들을 쥐떼가 습격했다." 문명세계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참극이 었다. 벨파스트 퀸츠대학에서 경제사를 가르치는 리엄 케네디 교수는 대 기근이 몰고온 결과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사건의 여파로 그 뒤 1백년 동안 아일랜드의 인구가 지속적으로 줄었 다. 일반적인 인구증가 패턴과는 정반대였다. 또한 유랑과 이주가 일상화 되면서 전통적인 가족구성이 파괴되었다. 이산가족이 속출하고 사회기반 이 허물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구의 대규모 해외이민이 아일랜드인 에게는 마치 정상적인 삶의 형태처럼 굳어져 버렸다."

런던대학의 역사학 교수 에릭 홉스 봄은 유명한 근대사 4부작 중 <자본의 시대>에서 이 대기근으로 인한 아일랜드인의 해외이민이 당시까지 역사상 최대규모의 인구이동을 낳았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1851년에서 1880 년 사이 해외로 이주한 아일랜드인은 모두 5백30만명이었다. 이런 유례없 는 대탈출은 세계사적으로도 중대한 양상을 가져왔다. 농민들이 대도시 빈민으로 내몰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복잡한 국적·시민권 문제 그리고 그 에 따른 인종차별 등이 대규모로 나타났다.


사과만으로 양국 악감정 씻겨질지 의문

이날 블레어는 “엄청난 재난에도 굴하지 않고 일어선 아일랜드 국민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면서 “오늘날 영국은 아일랜드 국민의 우수한 재 능과 탁월한 능력에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아일랜드 국민들을 추켜세웠 다.

또 영국의 언론은 이날의 행사와 블레어의 사과를 담담한 어조로 전했다. 진보적 일간지 <가디언>은 블레어가 처음으로‘당시 영국의 악역’을 언 급한 총리라고 그를 평가했다. 하지만 블레어 총리의 이날 ‘사과’가 아 일랜드인과 영국인 사이에 깊게 파인 골을 얼마만큼 메울 수 있을지는 여 전히 의문이다. 블레어의 사과로도 아일랜드인들의 그 많은 죽음과, 그 많은 가정파괴와, 그 많은 이민은 되돌릴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재 1백50년전 아일랜드 대기근과 같은 상황에 처한 북한을 외면하고 있 는 한국과 그 주변국가의 모습에서 당시 영국인을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연상일까.

런던=권은정 통신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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