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1997년03월20일 제 149호 한겨레21

흥부는 실존인물이었다

(사진/남원시가 지난 95년 흥부 출생지로 지정한 동면 성산리. 저수지가에 세워진 누각이 흥부각이다.)

흥부는 단순히 옛날 이야기 속의 허구적 인물인가 아니면 실존했던 사람 인가?

결론부터 얘기하면 흥부는 생존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야기 속의 흥부와 똑같은 인물이 있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흥부의 모델 이 됐던 사람이 실제로 있었다는 게 지금까지 이뤄진 `흥부전'과 흥부에 관한 조사·연구의 결론이다. 즉 실존인물의 구체적 삶을 바탕으로 여기 에 갖가지 얘기들이 보태져 작품화됐다는 것이다.


‘흥부 모델’ 광대들이 작품화 추정

그렇다면 흥부의 모델이었던 사람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살았을까? 또 그 의 이름은 실제로 무엇이었을까? 흥부가 실존인물이라면 놀부는 어떤가?

흥부의 실존인물 복원 작업은 80년대 들어 전북 남원시 동면 주민들에 의 해 시작됐다. 이들은 남아 있는 문헌과 구전되어온 설화 및 유적들에 대 한 조사 결과를 근거로 동면 성산리가 흥부의 마을이라고 주장하기 시작 했다. 그 이전까지도 `흥부전'의 무대가 남원시일 것이라는 데는 별 이견 이 없었다. 문제는 남원시 중에서도 구체적으로 어느 곳이냐였다.

`흥부전'이 남원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문헌을 통해 확인된다 . 18세기 중반부터 판소리로 불리기 시작한 뒤 19세기 중반 소설로 정리 된 `흥부전'은 ‘판소리계 소설’이다. 판소리는 광대들의 작품이다. 광 대들은 공연을 위해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흥부전'은 이렇게 흥부의 모 델을 직접 만났거나 또는 그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광대들이 작품화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흥부전'은 판소리 창본(唱本)과 소설 이본(異本)이 수십종에 이른다. 소 설은 `흥부전' 또는 <연(燕)의 각(脚)>, 판소리는 <흥보가> 또는 <박타령 >으로 불린다. 그런데 이들 판소리 창본들과 소설들은 거의 예외 없이 흥 부가 사는 곳을 ‘경상 전라 양도지경(兩道之境)’으로 묘사하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지리산 근처다. `흥부전'을 보면 지리산이 자주 등장 한다. 놀부가 오랜만에 찾아온 흥부에게 양곡 대신 ‘지리산 박달나무 몽 둥이’ 를 안겨주거나 지리산으로 제비를 후리러 나가는 대목들이 그렇다 . `흥부전'의 무대를 아예 남원으로 적시한 것도 있다. 1870년에서 1873 년경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신재효의 판소리창본 <박타령>이다. <박타 령>에는 다른 창본이나 소설 이본에서는 볼 수 없는 ‘흥보 유랑기’가 나온다. 놀부에게서 쫓겨난 뒤 흥부가 가족과 함께 떠돌아다닌 지역을 소 개하는 대목이 나오는 데 이렇다. “원산, 강경, 법성이 낙안 부원다리 부안 줄포 근방 다 찾아 다녀보고(중략) 순창 복흥 태인 산안 한다는 좋 은 데를 다 뒤져 다녀보고 고향 근처에 당도하니 촌명은 복덕이요.” 다 시 말해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를 두루 돌아 산안(지금의 남원시 산내면) 을 끝으로 고향 근처에 다시 돌아오니 그곳 이름이 복덕촌이었다는 것이 다.

동면 주민들은 흥부가 놀부에 쫓겨난 뒤 정착했다는 복덕촌이 바로 동면 성산리라고 주장한다.

교직에서 물러난 뒤 지난 86년부터 흥부 복원 작업을 해온 정용웅(76·남 원시 동면 인월리)씨는 “복덕촌은 원래 위쪽의 성현동과 아래쪽의 복덕 촌으로 나뉘어 불리다 둘을 합해 성복골로 바뀌었고 일제의 행정구역 개 편 때 성이 있는 산동네라는 뜻으로 다시 성산리로 개칭됐다”고 말했다.

정씨는 인간문화재 강도근의 창본 중 ‘흥보 제비 노정기’에도 성산리가 흥부 마을임을 확인해주는 대목이 나온다고 덧붙였다. “이때 흥보가 어 디 살았는고 하면은 팔량재 밑에 살았겠다”는 대목인데, 팔량재는 성산 리에서 경남 함양군으로 넘어가는 길목으로 팔량재 아래 바로 성산리가 산비탈에 들어서 있다. 팔량재는 재담이기는 하지만 김연수의 창본에도 등장한다. “흥보가 설사를 허는듸 궁둥이를 부비적 부비적 홱 틀어노니 누런 똥줄기가 무지개살같이 운봉 팔영재 넘에까지 어떻게 뻗처놨든지 지 내가는 행인들이 보고는 황룡 올라간다고 모다 늘어서서 절을 허든 것이 었다.” 굶주렸던 흥부가 박 속에서 나온 쌀로 밥을 너무 많이 해 먹고 설사를 하는 대목이다.


흥부는 연씨가 아닌 박씨였다?

동면 주민들은 성산리가 바로 복덕촌이라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옛날 이곳에 살았다는 얘기가 전해오는 박 첨지가 흥부의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 성산리 주민들이 전해주는 ‘박 첨지 설화’는 이렇다.

“옛날 박 첨지라는 부자가 살았다. 그는 원래 가난해 품팔이를 하며 어 렵게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날 나그네가 찾아와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했 다. 가난한 박 첨지는 식량을 꾸어 나그네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다음날 나그네는 ‘수수와 박을 많이 심으면 부자가 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박 첨지는 부지런히 수수와 박을 심었다. 수수는 양식으로 쓰고 박은 바가지로 만들어 내다 팔면서 박 첨지의 생활이 피기 시작했고 점점 논밭을 늘리고 가축도 길러 큰 부자가 됐다. 성품이 훌륭한 박 첨지는 가 난한 사람들을 위해 적선을 아끼지 않았고 마을을 지나는 나그네들에게도 친절히 대했다. 그러나 몇해 뒤 마을에 괴질이 돌아 박 첨지네 가족이 모 두 죽었다. 세월이 흘러 마을을 지나던 나그네들이 이 소식을 듣고 돈을 모아 마을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면서 박 첨지 가족의 묘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나그네들의 정성에 감동한 마을 사람들도 제사 비용을 댈 제답 을 마련해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삼월삼짓날이면 박 첨지 가족 묘에 서 제사를 지냈다.”

성산리 주민들은 요즘도 삼월삼짇날이 되면 마을 건너편 야산에 있는 박 첨지 가족 묘에서 제사를 지낸다.

박 첨지처럼 흥부도 성이 박씨다. 1860년에 발간된 것으로 추정돼 현존하 는 `흥부전' 중 가장 오랜된 이본인 경판본(京板本)에는 “놀부는 형이오 흥부는 아우라’로만 돼 있고 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지만 신재 효 창본 이후에는 “박가 두 사람이 있으니 놀보는 형이요 흥보는 아우인 데”라는 식으로 대부분 흥부의 성을 박씨로 적고 있다. <자유종>의 작가 이해조가 1913년 내놓은 <연의 각> 등 일부 이본들이 흥부의 성을 연씨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본들 사이의 시대순을 감안할 경우 박씨가 신빙성이 있다는 게 학계의 평가다.

성산리 주민들은 성산리에는 아직도 `흥부전'을 연상시키는 지명들이 적 지 않다는 점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보은 제비가 흥부집을 찾아 맴돌 았다는 마을 뒷산 봉우리인 연비봉, 도승의 말에 따라 집터로 잡아 부자 가 됐다는 흥부네 텃밭, 흥부가 놀부에게서 쫓겨나 짚신을 털며 아픈 다 리를 움켜쥐고 신세를 한탄했다는 신털바위, 흥부가 제비의 은덕을 기리 기 위해 놓았다는 연하다리 등등….

성산리에 부락이 형성되던 당시부터 지금까지 10대째 살아오고 있는 서정 갑(60)씨는 “주택개량 사업으로 지붕이 바뀌고 박 바가지가 자취를 감추 고 있지만 예전에는 제비가 너무 많이 날아와 빨랫줄에 빨래를 널 수 없 을 정도였다. 또 산촌으로 농토가 좁아 밭두렁이나 집 둘레 빈 터에 박을 심어 만든 바가지는 중요한 소득원이었다”고 회상했다. 남원시가 주최한 흥부제 행사 때 흥부로 뽑히기도 한 서씨는 “마을 사람들의 심성이 부지 런하고 착해 집집마다 대문이 없는 우리 마을이야말로 흥부마을이 아니냐 ”고 덧붙였다.

결국 박 첨지가 흥부의 모델이고 성산리는 흥부마을이며 놀부는 `흥부전' 이 작품화되면서 극적 재미를 위해 곁들여진 인물이라는 게 동면 주민들 의 주장이다.


동면의 박첨지냐, 아영면의 춘보냐


(사진/성산리와 성리는 흥부마을 논쟁 끝에 성산리는 흥부 출생지로, 성리는 흥부 발복지로 지정됐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아영면 주민들이 동면 주민들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 하면서 두 마을 사이에 흥부마을 지정을 둘러싸고 일대 논쟁이 벌어지게 됐다. 아영면 주민들도 동면 못지 않게 흥부와 관련된 문헌과 설화 및 유 적들을 제시한 것이다.

우선 복덕촌 문제와 관련해 아영면 주민들은 복덕촌은 동면 성산리가 아 니라 성산리에서 약 7km 떨어진 아영면 성리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역시 아영면에서 흥부 복원 작업을 해온 이상두(69·남원시 아영면 청계 리)씨는 “성리의 복성이재를 넘어가면 복성리(福星里)라고 부르는 마을 이 있는데 이 복성리가 바로 신재효의 창본에서 흥부가 유랑 끝에 정착했 다는 복덕촌이다. 복성리란 것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인 변도탄이 좋은 별빛을 따라 찾아왔다고 해서 붙인 이름인데 그는 임진왜란 때 이곳을 전 략적 요충지로 활용했다. 복성은 목성을 뜻하는 말로 <대한한사전>에 따 르면 복덕성의 약어이다. 따라서 복성리는 복덕성의 약어인 복성에 마을 을 뜻하는 리를 붙인 것으로 지금은 행정구역상 장수군 번암면에 속하지 만 조선시대 때는 성리 땅이었다. 따라서 성리가 바로 흥부마을이다”고 주장했다.

복성리에 산신각을 짓고 사는 이상재(68)씨도 “어릴 적에 나무하러 온 어른들이 이곳이 흥부가 살던 복덕촌이라고 하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고 회상했다.

성리에도 성산리의 박 첨지 설화처럼 `흥부전'의 원형이라고 얘기되는 ‘ 춘보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아영면 주민들이 들려주는 춘보 설화는 이 렇다.

“옛날 박춘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하도 가난했다. 춘보가 어느날 허기 져 마을 고개에서 쓰러졌다. 이때 마을 사람이 춘보를 업어다 흰죽을 먹 여 구완해주었다. 춘보는 그뒤 도승이 잡아준 집터로 옮겨 큰 부자가 되 었다. 부자가 된 춘보는 전에 자신을 구해준 사람에게 보답으로 논 아홉 마지기를 사주고 이웃들에게 선덕을 베풀었다. 마을 사람들은 오래 전부 터 매년 정월 초삼일이 되면 춘보를 기리는 망제를 지내왔다.”

성리 주민들은 한동안 중단됐던 망제를 지난 92년 부활시켰다.

아영면 주민들은 흥부와 춘보의 발음이 비슷한 점도 춘보가 흥부의 모델 이라는 증거로 제시한다. 먹보 울보 잠보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 뒤에 붙이는 접미사는 ‘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판소리쪽에서 지금도 <흥부가>나 흥부가 아니라 <흥보가>나 흥보로 부르는 데서도 확인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흥부전'이나 흥부로 불리게 된 것은 1890 년 무렵 간행된 목판본 `흥부전'이 조선 팔도에 널리 보급됐고 해방 뒤에 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흥부전'이 실리면서 흥부와 놀부로 가르쳤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엄밀한 고증은 불가능할 수도

성리에도 성산리처럼 `흥부전'을 연상시키는 지명들이 적지 않다. 놀부가 부자가 된 흥부에게서 화초장을 얻어 돌아가던 중 쉬었다는 화초장바위 거리, 도승이 흥부에게 잡아준 집터인 고둔터, 춘보가 허기져 쓰러졌다는 고개인 허기재 등등….

이처럼 동면과 아영면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자 남원시의 의뢰로 경희대 민속학연구소가 92년 7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흥부전' 발상지 고증작업 을 벌였다. 민속학연구소는 이 기간 동안 문헌조사와 현지조사를 거쳐 아 영면의 손을 들어주었다. 민속학연구소가 고증자료의 부족이란 한계를 인 정하면서도 내놓은 결론은 이렇다.

“박 첨지는 놀부 같은 인물이고 춘보가 흥부 같은 인물로 두 사람은 형 제다. 욕심 많은 형 박 첨지는 춘보를 성산리 고향 집에서 쫓아냈고 춘보 는 유랑 끝에 성리의 복덕촌에 정착한다. 춘보는 그뒤 다시 성리의 고둔 터로 이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자가 되었으며 이웃 주민들에게 선덕 을 많이 베풀었다. 반면 욕심 많은 박 첨지는 괴질로 죽은 게 아니고 민 란이 일어나 가족 전체가 몰살당한 것이다. 형의 참변 소식을 전해 들은 춘보가 성리로 찾아와 형의 장례를 치러주고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주며 해마다 제사를 지내줄 것을 부탁했다.”

박 첨지를 흥부의 원형으로 생각하고 흥부마을에 산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온 동면 주민들이 민속학연구소의 조사 결과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이에 따라 남원시는 지난 95년 양시론을 내놓았다. 아예 놀부를 배제한 채 성산리는 흥부의 출생지, 성리는 흥부의 발복지(發福地)로 정했다. 둘 다 흥부마을이 된 것이다.

동면과 아영면 각각의 주장뿐 아니라 경희대 민속학연구소의 조사 결과 역시 확실한 고증자료를 확보한 상태에서 내려진 것이 못 된다. 따라서 흥부의 실제모델은 누구고 또 흥부마을이 어디인지를 확정짓기 위해서는 더욱 엄밀한 고증자료를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2백년 이상이 지 난 지금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흥부전'이 조선조 후기 남원 지역에 살았던 사람을 소재로 여러 가지 얘깃거리를 가미해 만든 작품이며 그 사람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 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들을 갖추었던 인물이란 점은 분명하다.

남원=안재승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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