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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발굴/단명의 길, 디엔반의 비명
68년 1월 청룡부대 학살현장 르포… “당산나무 아래 위령비라도 세웠으면”

(사진/오른쪽 허벅지의 총탄자국을 보여주는 풍니촌 럽남 마을의 생존자 쩐티득 할머니)

“아이들 주검은 상자나 대바구니에, 어른들 주검은 커다란 채반에 담아 머리에 이고, 어깨에 지고 또는 끌면서 이 길을 걸었어. 마을은 깡그리 불타고, 어디 담요나 해먹(그물침대)이 남아 있어야지.” 당시 61명의 목숨을 앗아간 학살 현장에서 두명의 누나와 네명의 조카를 잃은 응웬수(71) 할아버지의 회상이다.

시신 둘러메고 시위에 나서다

다낭에서 남쪽으로 23km 떨어진 쿠앙남성의 디엔반현.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이곳 탄쿠잇다리(디엔탕사)에서 지압바다리(디엔안사)에 이르는 구간을 ‘단명의 길’이라 부른다. 디엔안 양민학살 현장의 또다른 생존자 쩐티득(72) 할머니(응웬수 할아버지와 사돈관계)를 만나러 가는 길. 수 할아버지가 차창 밖을 가리키며 “바로 여기야”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손끝을 따라가봐도 땅이 도톰하게 솟아 있는 듯 느껴질 뿐, 봉분도 없는 무덤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한국군들이 물러가고 난 뒤, 마을사람들이 시신을 들쳐메고 길게 열을 지어 키엠루 초소를 찾아갔어. 만장도 없고, 그 흔한 눈물도 없고, 다들 넋이 나가서는 곡성도 풀어놓질 못했지….”

(사진/풍넛촌 생존자 응웬수 할아버지)

주민들은 남베트남 정부군 초소 앞 도로 양옆으로 시신을 늘어놓고 ‘청룡’에 대한 응징을 호소했다. 그러나 초소의 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고, 파리떼가 하늘을 새까맣게 덮을 무렵에야 초소 군인들이 빗장을 열고, 장례에 쓸 널빤지와 천을 내주며 사태수습에 나섰다. 이미 부패해 진물이 줄줄 흐르는 주검은 다시 마을로 옮겨지지 못하고 도로변에 그대로 묻혔다. “널빤지와 천으로 시신을 묻을 순 있어도 우리 디엔안 주민들 가슴속 원한이야 어찌 묻겠누….”

쩐티득 할머니는 집에 없었다. “그 양반 허구한 날 절에서 살지.” 할아버지의 짐작대로 쩌우퐁절(주봉사)에 찾아가서야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아가! 네가 따이한이냐?” 본존 불상을 모신 대웅전에서 예불을 드리던 할머니는 신발을 챙기지도 못한 채 맨발로 달려나왔다. 할머니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필자의 얼굴과 등짝과 손을 고루 쓰다듬었다. 마치 정말 따이한인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나 하나 살겠다고 자식 손을 놓은 에미가 무슨 할말이 있다고….” 할머니는 얘기 도중 “에구 망할 것…”하며 자꾸만 당신의 가슴에 종주먹을 쳐댔다.

1968년 1월14일(음력) 퐁니촌 럽남 마을. 아침에 눈을 뜨니 어젯밤까지 콩을 볶아대듯 울려오던 포성도, 간간이 섞여오던 총성도 거짓말처럼 뚝 그쳐 있었다. “오늘 아침은 조용한 걸 보니 별일 없을 모양이야. 시장이나 퍼뜩 다녀오자구. 아무리 어수선하다지만 대보름 제사를 거를 순 없지 않은가.” 쩐티득은 아들 찐쩌(당시 12살), 옆집 부인 판티찌(65)와 함께 장을 보러 나섰다. 동구 밖까지 나섰을 때, 갑자기 1번 국도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와 함께 총과 탄환이 부딪혀 달각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약 1개 중대의 한국군(호이안 주둔 청룡부대 소속)들이 지압바다리를 건너 마을을 향해 전투대형으로 행군해오고 있었다. “어이! 마을 사람들, 남조선 군인들이 쳐들어오온다아!” 찌가 득의 팔을 잡아끌면서 냅다 뛰었다.

(사진/어머니와 딸을 잃은 응웬티퉁 할머니)

"아들의 원혼을 달래고 싶어"

마을 고샅길에 이르러 뒤를 돌아다보니 아들 찐쩌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득은 다시 들판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마을 초입의 당산나무 앞까지 몰려온 한국군들이 “비시(VC: 베트콩), 비시”를 외치며 기관총을 갈겨대고 있었다. 득은 갑자기 옆구리와 오른쪽 허벅지에 통증을 느끼며 판티응으의 논바닥으로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 달아나려는데, 뒤쪽에서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우르르 덮쳐왔다. 수류탄이 날아들고 득은 점점 눈앞이 흐려져 오는 걸 느꼈다.

“후에 부인 집 양어장에서 물에 퉁퉁 불어 있는 주검 17구를 끌어내고는 곧장 판티응으 부인 논으로 달려갔어.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두개골이 박살나고, 창자가 터져나온 시쳇더미를 들어내니 맨 밑바닥에 이 할머니가 온통 피칠이 되어 누워 있었지. 아무리 전쟁중이지만 그렇게 잔인할 수가 있어? 응웬티탄(당시 21살, 여)의 배에는 창자가 모두 들어내지고 채소와 잡풀이 가득 채워져 있더구만. 쯧쯧….” 수 할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쩌우퐁의 비구니 스님들께 작별을 고하고 봉고차에 오르려는데, 아무리 찾아도 득 할머니와 수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까 먼저 걸어나가시던데요.” 한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급히 그뒤를 쫓았다. 마을까지는 장정의 걸음으로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이다. “다낭으로 가는 길 아닌감. 방향이 다르잖아.”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옷이며 머리의 먼지를 다 털어내고 신발까지 벗어들고서야 차에 오른다. 더이상 차가 들어설 수 없는 마을 들머리. 두 사람에게 한국 정부의 사과나 보상을 원하는지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게 다 전쟁 탓 아닌감. 늙은이 소원이야 그저 아들 녀석 원혼이나 달랬으면 하는 거지. 저기 저 당산나무 아래에 위령비나 하나 섰으면 좋겠어. 인민위원회에서 돈을 갹출한다는 얘기도 들리더구만….” 차가 모퉁이를 돌아서도록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구부정하게 서서 하염없이 손을 흔들었다.

쿠앙남=글·사진 구수정 통신원

chaovietnam@hotmail.com

한겨레21 1999년 10월 28일 제2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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