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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자유, 아나키즘!
국가권위를 타파하는 자유로운 연합과 부조의 공동체… 당신도 아나키스트인가

(사진/무소유를 지향하는 화성의 야마기시즘공동체)

“당신은 아나키스트입니까?”

이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처음 드는 생각은 ‘웬 뜬금없는 소리?’이거나 ‘나를 사회생활에 문제있는 사람으로 본다는 건가?’일 확률이 높다. 그리고 대개는 “나는 공상을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오”라고 점잖게 대꾸할 것이다. 이제 아나키즘은 한때의 유행으로 기억되는 옛 노래이거나 영화 속 이상주의자들의 사상일 뿐인가.

아나키스트들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그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빚어지고 있는 ‘아나키즘적’ 현상을 본다. 사회적 논란거리로 등장한 분당주민들의 판교 통행료 거부운동이나, 언론에 심심찮게 소개되고 있는 지역화폐운동 등이 최근의 예다.

이에 대한 아나키스트들의 해석을 듣기에 앞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다. 동아시아의 아나키즘을 분석한 영국의 존 크럼 요크대 교수의 지적이다. “한국에서 아나키란 말은 ‘무정부’와 동의어로 쓰여온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일본 학자들이 잘못 번역한 것이다. ‘An’은 ‘없다’ ‘아니다’라는 뜻이고 ‘Archy’는 ‘우두머리’ ‘강제권’‘전제’ 따위를 의미하는 말로서 ‘Anarchy’는 이런 것들을 배격한다는 뜻이다.” 자율주의라는 번역이 더 적합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사진/판교-분당 통행료 거부운동도 아나키즘 색채를 띤다)

판교-분당 통행료 논쟁과 아나키즘

아나키스트들은 권력의 집중을 거부하고 분권주의를 주장한다. 또한 직접민주주의를 통한 시민참여를 추구한다. 대부분의 시민이 반대하는 사항을 여야가 담합처리할 때처럼 명백히 공익에 반하는 정책결정이 내려질 경우 이들은 시민불복종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분당주민들의 통행료 거부는 자신과 관련된 문제를 국가권력의 결정에 맡기지 않고 직접 행동에 나섰다는 점에서 분명 아나키즘의 색채를 띤다는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묻는다. “투표용지 한장에 자신의 모든 운명을 걸어야 하는가.” 자발적이고 자치적이며 협동적인 소규모 공동체가 형성되고 이런 공동체가 서로 자유롭게 연합하는 사회가 아나키스트들의 목표지점이다. 이들은 자율적인 공동체에서 자기 운명을 직접 개척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믿는다.

지역화폐운동이 아나키스트들의 주목을 받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이 운동은 한마디로 회원들 사이에서 화폐의 매개없이 물건과 서비스를 주고받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용사 ㄱ씨가 ㄴ씨의 머리를 깎아주면 가상의 화폐로 1만원을 적립하게 되고, 나중에 ㄷ씨의 서점에 가서 1만원짜리 책을 그냥 가져온다. ㄷ씨가 ㄴ씨의 카센터에서 10만원어치 서비스를 받는다면 그뒤 누군가에게 9만원어치의 책을 주면 된다. ㄴ씨는 9만원을 적립한 셈이고 그만큼 다른 회원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사진/농산물 생산과 소비를 직접 연결시키는 한살림운동도 에코-아나키즘과 통한다)

‘생태공동체운동’으로 한발짝 더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는 생태공동체운동은 아나키스트들의 꿈에 한발 더 다가간 흐름이다. 야마기시즘공동체 등 무소유를 지향하는 것에서부터 귀농자들이 모여 사는 형태까지 각종 농촌공동체가 전국적으로 100여곳에 이르고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다. 환경친화적인 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노동과 분배를 공동으로 하고 강한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는 생태공동체는 아나키스트들이 보기에 분명 경쟁에 기반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며 아나키즘의 핵심요소인 자연친화의 구현이다.

모든 형태의 지배를 혐오하는 아나키즘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 또한 반대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 생산력의 끊임없는 증대를 통해 무한한 물질적 소비가 보장되는 지상낙원을 건설하려는 발전논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결국 자연의 황폐화를 불러오고 자연과 인류의 공멸을 낳고 만다는 것이다. 환경문제를 특히 중시하는 아나키즘의 흐름은 에코-아나키즘이라는 새로운 유형으로 자리잡았다.

시민운동의 대표적 분야인 환경운동도 에코-아나키즘과 통하는 것은 아닐까. 임지애 환경운동연합 정책실 팀장은 “지금은 우리에게 맞는 환경철학이 형성되고 있는 과정이며 에코-아나키즘이 우리의 철학이라고 하기는 힘들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환경에 대한 정부의 횡포와 전횡에 대항해 권력의 제한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생태공동체운동과 함께 아나키즘의 색채를 가장 강하게 드러내는 움직임으로 대안학교운동을 들 수 있다. 대안학교의 본보기로 여겨지는 서머힐의 설립자는 아나키스트였다. 권위적인 제도를 부정하는 아나키스트들은 기존의 학교도 부정하면서 이를 대체하는 새로운 배움터를 주장한다. 이들의 문제제기는 아나키즘이란 이름표만 떼어내면 아주 익숙한 것이다.

“모든 어린이에게 동일한 내용의 국가중심 교육을 시키는 게 민주적인가. 국가가 주도하는 수험경쟁을 치르는 것이 인생을 단련하는 것인가. 교사가 체벌 등 강압적인 수단을 통해 순종하는 아이를 만드는 것이 바른 교육인가.”

아나키스트들이 제안하는 교육은 자기결정을 할 줄 아는 자유로운 인간의 교육, 어린이에 대한 능력별 교육, 교사와 학생이 동등한 교육, 공동생활을 통해 스스로 인간관계를 배우는 교육이다. 구승회 동국대 교수(철학)는 “생태공동체나 대안교육운동은 당사자들이 의식하건 하지 않건 아나키즘적인 이념에 근거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아나키즘은 다양한 시민운동에 뿌리를 대고 있다. 국가와 구분되는 시민사회의 등장이 아나키즘이 되살아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역으로 시민운동은 아나키즘에서 그 이론적 자양분을 얻을 수 있다고 아나키스트들은 말한다.

우리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90년대는 민중운동이 지배했던 70∼80년대를 지나 시민운동으로 나아가는 시기로 평가된다.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억압뿐 아니라 환경, 여성, 지역불평등, 사회적 폭력 등 다양하게 대두되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한계를 드러냈다는 게 아나키스트들의 생각이다. 예를 들면 여성차별을 자본주의적 착취나 억압의 차원에서만 설명할 수는 없으며 모든 사회조직과 사회관계에 구조화한 서열적 권력관계의 산물로 파악해야 한다는 식이다.

더 나아가 김성국 부산대 교수(사회학)는 새로운 세기의 지평에서 아나키즘을 말한다.

“자본주의적 경쟁체제 대신 상호부조의 공동체를 지향하며, 직업혁명가 주도의 권위주의적 계급독재 대신 민중·서민이 직접 참여하는 자유주의적 자치사회를 모색하며, 폭력과 억압에 기반을 두는 강권적 국가지배 대신 지역단위의 소규모 연합사회를 추구하는 아나키즘은 21세기를 위한 분명한 시대적 좌표가 될 수 있다.”

미국의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가 <메가트렌드>에서 꼽은 현대사회의 10대 조류 가운데는 지방분권사회, 자조사회, 수평적인 네트워크 등이 들어 있다. 다가올 21세기는 아나키스트들의 이상에 좀더 접근한 세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인터넷의 급속한 확산에 주목하는 아나키스트들은 “지구 전체를 연결하는 인터넷의 위력이 국가의 경계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으며 세계적인 차원에서 자유로운 네트워크형 사회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반기고 있다.

하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아나키즘은 생산활동의 조정문제, 분배의 문제, 법 규제 없이 반사회 행위가 통제될 수 있다는 가정 등 구체적인 실천의 차원에서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모든 강제적인 권력에 의한 지배를 거부하고 인간들의 자유로운 연합과 상호부조에 기반한 공동체적 이상사회를 추구하는 아나키즘은 그 종착역을 너무 멀리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방영준 성신여대 교수(교육학)는 “그럼에도 아나키즘은 권력에 대한 태도, 자유로운 사회관계의 이상을 끊임없이 제기함으로써 그 신선한 생명력이 유지된다”고 말한다. 다음에 도착할 역, 바로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강요하지 않으면서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게 아나키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권위에 맹종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이들에게 진지한 답변을 기대하면서 다시 한번 물을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은 아나키스트입니까?”

박용현 기자

piao@hani.co.kr

한겨레21 1999년 10월 21일 제2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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