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특별기고 [an error occurred while processing this directive]
 

야누스의 얼굴
베트남 참전작가 황석영이 본 ‘베트남에서의 한국군 양민학살’

<한겨레21> 273호 특집 ‘베트남 종단 특별르포- 한국군 양민학살 현장’을 읽고 소설가 황석영씨가 글을 보내왔습니다. 늦게나마 우리의 치부를 주목할 ‘휴머니티’를 갖게 된 것이 다행스럽다는 필자는, 20세기 서구사회가 아시아 등지에서 저지른 온갖 사악한 정치·군사적 행위와 함께 우리 자신들이 아시아에서 저지른 행위 역시 조사·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황석영씨는 베트남전쟁 기간중 1967년 8월부터 68년 10월까지 다낭에서 해병대원으로 참전한 바 있습니다. 편집자

황석영/ 소설가

베트남에서의 한국군의 ‘양민학살’에 관한 기사를 보면서 착잡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그동안 은연중에 알고 있었으면서도 ‘햇빛’ 아래 드러나는 데에는 적어도 현재 정도의 사회적 여건이 필요했을 터이다.

‘라이따이한’은 얼마나 부차적 문제였나

그 기사를 읽은 무렵에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지방 나들이를 다녀오던 날 오후에 올림픽대로에서 교통대란을 만났고 그것이 베트남전 고엽제 피해장병들의 항의 데모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원폭피해자들이나 마찬가지로 죽어갈 때까지 본인 스스로도 불치의 병에 시달릴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기형으로 태어나 성장하거나 뒤늦게 증상이 나타나 불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우리가 위의 두 사실에서 보는 바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세계 속에 널려 있는 사물의 양 측면에 대하여 유념하지 않으면 감상에 빠지기 쉽다. 어떻게 보면 ‘양민학살’에 대한 뒤늦은 조명은 몇년 전에 지식인들 사이에서 동정적으로 일어난 한인 혼혈아들, 이른바 ‘라이따이한’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부차적인 문제였던가를 한마디로 드러내준다. 그뿐 아니라 일본의 우익들이 난징 학살이나 정신대 문제를 거론하는 한국 여론에 대하여 ‘베트남에서의 한국군의 만행’을 예로 들며 방어하기도 한다.

내년이면 6·25전쟁 발발 50주년이 되는데 우리는 아직도 이 전쟁의 올바른 성격 규명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도 분단된 채로 ‘정전체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작년에는 외국의 학계에서는 다 알려진 ‘한국전쟁’에 대한 어떤 관점이 ‘친북 용공’으로 몰리기까지 했는데, 더욱 놀랄 일은 그 견해의 발표자가 대통령의 정책기획자문위원장이라는 막강한 위치에 있던 사람인데도 그랬다.

한국전쟁을 일단 접어두고 이 글의 초점을 잡아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베트남전쟁’의 성격 규명을 해내야만 하겠다. 베트남은 19세기에 프랑스가 강점하여 식민지를 만든 이래로 일본이 점령했다가 다시 종주국이었던 프랑스의 식민지배가 되풀이되자 항불 독립전쟁으로 이어지고, 미국의 개입으로 남북이 갈라지게 된다. 북부는 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항불 독립운동가들이 주도 세력이 되었고, 남부는 일본이 만주에서 부이를 내세워 괴뢰정권을 만든 것처럼 후에를 중심으로 바오다이 왕조를 세웠는데 초대 대통령 고딘 디엠은 위 정부의 관료 출신이며 그뒤 군사정권의 역대 대통령이 모두 프랑스 식민지 군대의 장교 출신들이었다. 정권 초기부터 반민중·반민족적이었던 남베트남 정권은 폭압과 부패로 이어졌으며 그런 연유로 남쪽의 자유주의적 지식인이나 항불전쟁 당시의 독립운동가 또는 선진적인 사회주의자들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하고 투쟁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모든 서방의 논문 기사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베트남전쟁은 100년에 걸친 ‘베트남민족해방전쟁’이었으며 프랑스 제국주의의 직접 지배와 미국의 제국주의적 간접 지배에 대한 베트남 민족의 저항전쟁이었다. 우리는 위의 사실에서 상징적인 ‘비유’를 우리의 현대사에다 맞추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일제시대 태평양전쟁에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위하여 징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간 우리 아버지 세대와 냉전시대에 동아시아에 팍스 아메리카나의 블록을 형성하려던 미국에 의해 베트남에 끌려갔던 우리 세대에 무슨 차이점이 있는가.

양민학살은 필연적이었다

미국은 세계 도처에서 승리하는 전쟁을 수행해오면서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베트남에서 두 번째로 ‘이기지 못한 전쟁’의 쓰라린 경험을 치렀다. 한반도에서는 일찍이 2차대전에서 쓰고 남았던 무기들을 시기적절하게 소비했는데 태평양전쟁 때에 전 지역에서 전 과정에 걸쳐서 썼던 양보다 더 많은 무기를 한반도에 퍼부었다. 도쿄의 미극동사령부는 “한반도는 석기시대로 돌아갔다”고 정의했을 정도였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한달에 20억달러의 군비를 지출하면서 매달 10만t의 폭탄을 투하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수행한 전쟁은 ‘일종의 SF적 전쟁이었으며 한국전쟁 종결 이래 인간 파괴 기술이 이룩한 모든 진보를 시험해본 실험전쟁’이었다(일본의 세균전 요원들과 자료가 그대로 미군에 흡수되고 이것이 한국전 당시에 사용되었다는 것은 이젠 상식이 되어 있다. 이를테면 유사 흑사병인 유행성 출혈열이나 세계 학회에 등록된 한탄 바이러스는 그 잔재이다). 베트남에서는 제네바 협정에서 국제적으로 금지된 모든 ‘비인도적 살상무기’들이 과감히 사용되었으며 그것은 민간인과 게릴라의 구별이 없다는 뜻에서 ‘비정규전’으로 불렸다. 이를테면 모든 것을 불태우는 네이팜탄 따위는 일상적인 것이었고, 공중에서 터지고 나서 지상에 퍼진 뒤에 매파편들이 다시 터지는 고폭탄, 수백만개의 인마살상용 침이 일시에 터져나가는 CVB폭탄, DNC(디니트로올터 크레졸)폭탄, DNP(디니트로 페놀)폭탄 등의 화학탄과, 각종 가스, 그리고 저 유명한 고엽제가 정글과 마을에 광범위하게 뿌려졌다.

나는 1967년 8월부터 68년 10월까지 베트남의 다낭에서 해병대원으로 근무했는데 출라이 기지에서는 ‘기동순찰병’으로 다낭에서는 합동수사대의 ‘시장조사요원’으로 근무했다. 따라서 국한된 전선의 보병들보다는 광범위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베트남전쟁이 미국에서 해방전선과 북베트남쪽으로 주도권이 넘어가는 분수령은 68년의 ‘구정 공세’를 기점으로해서였다.

이 무렵에 미군 사령관 웨스트모얼랜드는 기존의 ‘색적섬멸’ 작전에서 전환하는데, 게릴라의 근거지가 되는 자연 취락을 분쇄하고 ‘전략촌’을 만들어 베트남 민중을 수용해놓고 전략촌 바깥은 광범위한 ‘자유살상지역’으로 설정한다. 사실상 이 무렵부터 유명한 ‘밀라이 학살 사건’이니 ‘쾅트리 사건’이니 하는 양민학살 행위가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 전략촌 바깥에 걸어다니는 모든 것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자유 살상의 대상이 돼버린 셈이었다.

“피압박자가 피압박자에게 가혹하다”는 말이 있지만 아시아에서 이것은 보편적인 사실이 된다. 무엇보다도 일일이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한국전쟁에서 겪었으며, 베트남전쟁을 경험하고 돌아온 장교와 하사관이 참여했던 ‘광주’에서 그 생생한 예를 본다.

한국군 대다수는 가난했던 병사들

파리 소르본에서 교육을 받았고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외교부장으로 나중에 파리 회담에도 참석한 구엔 티 빈이 70년대 초반에 비동맹회의에 나와 발표한 바에 따르면 한국군의 ‘공식적’ 양민학살 건수는 약 3천여건에 이른다고 한다.

내가 알기로는 그러한 양민학살이 벌어지는 것은 대대적인 작전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중대나 소대와 같은 소부대 단위의 매복 수색 정찰 때 일어나기가 쉽다. 살상은 대단위 작전에서 휠씬 더 벌어지지만 인간적 원한의 흔적이 남지 않는 것은 인적 접촉이 없이 헬리콥터나 비행기에 의한 폭격 또는 대지공격이나 지상군의 포 사격 등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소 단위 병력은 노련한 지방 게릴라의 저격이나 부비트랩과 같은 장애물 때문에 마을 주변에서 죽고 다치는데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어긋난 민족감정이나 전우애로 복수심에 불타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이 무렵에 전선에 투입되었던 한국군의 대다수가 가난하고 굶주렸던(당시에 한국 농촌은 보릿고개를 연례행사로 치를 만큼 가난했다) 농촌 출신 병사들이었다. 박정희 유신정부와 막 태동하기 시작한 한국의 재벌들이 전쟁특수의 이득을 챙기는 동안에 그들의 목숨값은 하루에 1달러50센트 정도였다. 특히 일본은 한국전쟁에서 우리 민족의 피를 대가로 전후 복구를 수행할 수 있었고 베트남 전쟁특수를 통해서 현재와 같은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나는 이 세기말에 20세기의 서구사회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지에서 저지른 온갖 사악한 정치·군사적 행위를 기억하자는 사람이며, 특히 나는 아시아 사람이므로 아시아에서의 저들의 행위와 우리 자신들의 행위를 조사·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에게는 베트남에서의 ‘양민학살’과 같은 사건에 가슴아파하면서도 새삼스럽게 우리에게도 과연 서구의 시민들처럼 ‘휴머니티’라는 ‘여유’가 생겨난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저 올림픽대로의 일그러지고 찌그러진 불구의 아비와 아들들을 연민과 회한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미국의 철저한 경제·군사적 봉쇄 아래 지난 십년 가까이 계속해서 스러져간 백만에 가까운 북녘의 내 동포 ‘아사자’들을 생각한다. 이것이 세계에 드러난 사물들의 아이로니컬한 양면성이다.

한겨레21 1999년 09월 16일 제2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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