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특집Ⅰ [an error occurred while processing this directive]
 

베트남의 원혼을 기억하라
최초로 확인하는 한국군의 양민학살 현장… 이젠 그들의 슬픔을 함께 나눌 때

(사진/빈딘성 푸캇현. 16명의 가족을 잃은 응웬년 할아버지.)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이라는 기사를 기억하십니까.

<한겨레21> 256호(99년 5월6일자) ‘지구촌’에 실렸던 이 글은 베트남 전범조사위의 한국군 만행 기록과 그 일부 현장을 확인한 것으로 많은 독자에게 충격을 준 바 있습니다. 당시 판랑지역 르포를 통해 이 기사를 작성했던 호치민의 구수정 통신원이 이번엔 과거 한국군 주둔지를 중심으로 베트남 중부 5개 성(우리나라 도에 해당하는 행정단위), 9개 현(군 단위), 13개 사(읍면 단위), 수십개 마을들을 직접 돌아보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만난 100여명의 생생한 증언은 우리를 한없이 부끄럽게 합니다.

베트남전이 끝난 지 24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한번도 한국군이 남긴 상처에 대해 전면적으로 주목한 적이 없습니다. 일제시대 일본군의 만행과 6·25전쟁 당시 미군의 학살행위에 대해서는 소리높여 보상과 책임을 주장하지만, 우리가 가해자로 참여한 베트남전의 베트남인 피해자들에 대해선 외면으로 일관했던 것입니다. <한겨레21>은 이번 기획이 정부나 시민운동 차원에서, 한국군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간 베트남 원혼들을 위로하는 실천활동의 계기가 되길 기대해 봅니다. 이 작업은 20세기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정리하는 한 매듭이 되리라 믿습니다. - 편집자 -

(사진/땅굴에서 기어나오다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아 정신지체아가 된 레티티엣 쩐도안. 불행히도 그의 아들도 정신지체아로 태어났다.)

진혼의 노래라도 부르려는가. 아침부터 먹빛 얼굴을 하고 땅을 굽어보고 있던 하늘은 차가 사이공을 벗어나 1번 국도로 접어들자 바람을 앞세워 나무의 머리채를 흔들었다. 빗방울은 제몸을 차창에 던지며 투두둑 눈물을 떨군다. 삼십년. 한 아이가 태어나 자라고 결혼을 하고 어쩌면 그 또한 아비가 되었을 그 긴 세월의 강을 거슬러 가는 길. 서러운 혼넋들이 그렇게 눈물바람으로 맞았다.

너무나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

베트남의 동맥인 1번 국도를 잇는 주요 도시마다 베트남전 당시에는 한국군 부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백마부대는 캄란, 닌호아, 투이호아에 주둔했고, 맹호부대는 송커우, 퀴뇬, 푸캇에 그리고 청룡부대는 쭈라이, 호이안, 다낭에 주둔했다. 주월 한국군 총사령부는 사이공에, 주월 한국군 야전사령부는 나짱에 있었다. 그래서 과거 따이한의 족적을 찾아 떠나는 ‘순례의 여정’은 1번 국도를 끼고 이어진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건설했다는 왕복 2차선 도로는, 미국이 “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고 공언했던 것처럼 곳곳에 생채기를 안고 있었다. 움푹움푹 패여 있는 도로에서 차들은 깜짝깜짝 널뛰기를 했고, 구간구간이 아스팔트 복구공사로 끊겨 있어 시시때때로 슬로모션을 취해야 했다.

(사진/한국군에 강간당했다는 팜티호아 할머니. 수류탄에 의해 오른쪽 다리와 왼쪽 발목이 잘려나갔다<쿠앙남성디엔증사>.)

주월 한국군 참전 3훈에는 “적에게 용감하고 무서운… 월남인에게 예의바르고 친절한 따이한이 되자…”라고 적혀 있다. 한국군은 64년 9월22일 베트남 남부 붕타우를 통해 비전투부대인 태권도 교관단과 의료단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베트남전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65년 10월에는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와 맹호부대(수도사단)가, 66년 4월과 9월에는 맹호 제26연대와 백마부대(9사단)가 전투부대로 베트남에 상륙했다. 한국군들이 길을 닦고,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생필품을 지원하고 태권도를 보급하는 등 대민지원 사업에도 전투에 못지 않은 공력을 기울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한국군의 전부였을까. “한국군이 처음 마을에 들어올 때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을 당했어. 한국군이 마을에 주둔할 당시에 주민들은 마을 밖으로 쫓겨나야 했어. 전쟁이 끝나고 한국군이 마을을 떠나고나서야 사람들은 다시 마을에 돌아올 수 있었지.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야. 불발탄, 지뢰에 손발이 잘려나가는 고통이 계속되었고, 부모를 잃고, 아내를 잃고, 자식을 잃은 상실의 고통이 평생을 따라다녔어.”

참전용사들의 무용담 속에서 간간이 끔찍한 살육 얘기가 흘러나오긴 했지만, 나는 대개의 무용담이 그렇듯 과장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얘기를 듣는 일은 내게 그저 온몸에 소름이 살얼음처럼 돋아나는 공포영화를 한편 보는 것과도 같았다. 그 영화 속에서 언제나 엑스트라로 등장하던 베트남 사람들. 그러나 카메라의 앵글을 바꾸자 그들은 생생한 신음소리를 내며 주연배우로 처절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창자는 밖으로 튀어나와 덜렁거렸고, 불에 타 누렇게 녹아내린 지방층에는 구더기들이 기어다녔다.” “젖먹이까지 죽이고도 모자라 무덤조차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1번 A국도를 따라 채반을 들고 갈기갈기 찢겨져 흩어진 살점과 뼛조각을 주우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증언자들의 입에서는 한결같이 믿기 어려운, 믿기에는 너무 잔혹한 얘기들이 흘러나왔다. 한ㆍ국ㆍ군ㆍ의ㆍ양ㆍ민ㆍ학ㆍ살. 그 어울리지 않는 여덟 글자의 조합이 내 눈앞에서 어지럽게 맴돌았다.

학살양민 공식집계 5천명

흔히들 베트남전을 ‘전선 없는 전쟁’이라 부른다. 전후방이 따로 없고 피아의 구별도 없는 전쟁. 어떤 베트남전 참전용사는 이를 가리켜 “뻐꾸기 우는데 정작 나가보면 병아리도 볼 수 없더라”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베트콩은 어디에도 있었고, 또 어디에도 없었다. 베트남 사람들조차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을 ‘소이더우’(녹두콩을 섞어 지은 찰밥)라 불렀다. 낮에는 정부군이 통제하고 밤에는 베트콩이 지배하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군으로선 아군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양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냥해야 하는 현실에 맞닥뜨려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학살은 미리부터 예고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이공을 출발할 때는 우기라 빗발이 잦았는데, 중부에 들어서니 건기의 태양이 뜨거웠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온통 성하의 초록 물결. 멀리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구릉이 마을을 감싸고, 논에서는 넌라(베트남 삿갓모자)를 쓴 농부들이 광주리를 옆에 끼고 손으로 비료를 뿌린다. 논둑길을 따라 소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도랑에는 오리떼와 함께 헤엄치는 아이들…. 저 초록의 물결 위에 붉은 꽃물 하염없이 번져가던 날들이 있었다. 광주리를 팽개치고 달아나다 총에 맞은 농부들이 있었다. 새참을 이고 나왔다가 몸을 유린당하고 발가벗겨진 채 죽어간 처녀가 있었다. 그리고 또 어머니의 젖가슴에 매달린 채 죽어간 젖먹이가 있었다. 하늘도 눈이 멀던 그날에.

1965년부터 73년까지 9년여간 청룡ㆍ백마ㆍ맹호부대 등 총 31만2853명의 따이한이 머나먼 열대의 땅 베트남을 다녀갔다. 그중 4687명은 하나뿐인 자신의 생명을 이 땅에 부려놓고 원혼으로 돌아갔다. 이 기간중 한국군은 모두 1170회의 대대급 이상 대규모 작전과 55만6천회의 소규모 부대 단위작전을 수행했다. 한미 공동작전시에는, 미군은 주로 후방에서 포를 쏘고 한국군은 직접 마을에 들어가 작전을 펼치는 등의 역할분담이 이뤄졌다. 지휘부는 작전시 “깨끗이 죽이고, 깨끗이 불태우고, 깨끗이 파괴한다” “놓치는 것보다는 오인사살이 낫다” “보이는 것은 모두 베트콩이다” “물(인민)을 퍼내서 고기(베트콩)를 잡는다” “어린이도 첩자다” “땅굴이 있는 집은 모두 베트콩이다” 등의 전술지침을 가지고 있었다. 총구는 양민들을 향해서도 열려 있었던 것이다.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은 4만1400여명의 적군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이 밖에도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공식적인 통계로는 집계된 적이 없는 베트남 양민들의 희생이 있었다. 베트남 문화통신부에서는- 아직 불완전한 통계라는 단서를 달고 있긴 하지만- 한국군에 의해 집단학살당한 양민의 수를 대략 5천여명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학살현장의 주민들은 이 수치를 신뢰하지 않으며, 정부가 정확한 진상조사에 소극적이라며 노골적인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주민들이 주장하는 숫자가 어떤 지역에서는 베트남 문화통신부가 공인한 수치의 배를 넘어서기도 했다.

필자가 이번에 답사한 지역은 베트남 정치국에서 나온 <전쟁범죄조사보고서-남부 베트남에서 남조선 군대의 죄악>에 소개된 지역의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마주해야 했던 죽음은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죽음에 대한 고상하고 엄숙한 모든 개념들을 뒤집어버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들은 ‘베트콩’이 아니었듯 ‘열사’도 아니었으며, 그들의 죽음은 감동적이지도 비장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죽어서도 대접받지 못했다. 희생자들에게는 열사의 칭호도, 베트남 정부의 보조금도, 한국 정부의 보상도 없었다. 그러나 그 세월 동안 그들은 묵묵히 위령비를 세우고, 위령제를 올려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자료를 만들어 자신들의 상처를 역사에 새기고 있었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은, 학살의 현장을 다니고, 그들의 아픔을 들쑤시고 다니면서도 나는 한번도 ‘복수의 위협’에 시달려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 고단한 여정을 마치고 난 지금, 베트남 사람들이 보여준 순박함과 정감어린 미소가 가슴속에 따뜻한 샘으로 출렁이고 있음을 느낀다. 삼십년이 흘렀다. 이제는 우리도 그들과 함께 진혼의 노래를 불러야 하지 않을까.

호치민=구수정 통신원

chaovietnam@hotmail.com

한겨레21 1999년 09월 02일 제273호

.



클릭쇼핑몰
토론마당
대화방
접속
추천사이트

●지난호 ●한겨레21홈 ●씨네21 ●편집자에게 ●구독신청


Copyright 1995-1998 한겨레신문사
webmast@new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