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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리브리스/신을 위한 원죄의식

기독교는 사형집행인의 도덕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원죄의식? 뭔가 뒤집혔다. 원죄는 인간이 아니라 신에게 있다. 쓸데없이 터부를 만들어 놓고 그걸 깼다고 가혹한 죽음의 형벌을 내린 그야말로 죄의식을 느껴야 한다. 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애초에 선악과를 만들 때, 인간이 그걸 따먹을 수밖에 없으리라는 걸 몰랐을까? 전통적인 신학의 대답.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인간은 그걸로 죄를 짓는다. 자유를 악용한 그는 벌을 받아 마땅하며 형벌의 책임은 전적으로 그에게 있다.

순간 니체가 외친다. “책임을 찾는 모든 곳엔 복수의 본능이 있었다. 이 복수본능이 수천년 동안 인간의 주인이 됐다.” “의지에 관한 이론, 이 치명적인 거짓말은 처벌을 위해 발명된 것이다.” 자유의지론은 저열한 복수본능이 만들어낸 허위라는 얘기다. 그 어떤 휴머니즘보다 더 깊은 이 반휴머니스트의 휴머니즘. 그리하여 “자유의지론”으로 ‘보복’을 정당화하는 헤롯에게 외치는 광야의 소리. “기독교는 사형집행인의 도덕이다!”

‘보복론’에서 ‘재사회화론’으로. 범죄의 책임은 개인(자유의지)에서 점차 사회로 옮아간다. 여기서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도덕적 ‘주체’에서 사회라는 기계 속의 ‘객체’로, 그리하여 ‘도덕적 보복’의 대상에서 ‘과학적 관리’의 대상으로 변해간다. 니체는 당시를 지배하던 ‘보복론’의 허구를, 푸코는 현대를 지배하는 ‘재사회화론’의 허구를 폭로함으로써 형벌제도 자체를 물고늘어진다. 하지만 형벌이 복수욕이나 권력의 필요에서 나왔다고, 거기서 그게 부당하거나 불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오는 건 아니다(발생론적 오류).

그래서 난 형벌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형벌만 문제삼겠다. 사형제도. 이를 어떤 논리로 정당화할 수 있을까? 자유의지에 기초한 ‘보복론’? 미국에서 사형수의 절반은 흑인이다. 한마디로 사회의 책임이 크다는 얘기다. 근데 왜 사회는 책임을 지지 않고 책임을 묻기만 하는가? 사형의 협박으로 범죄를 ‘예방’하겠다? 사형제도가 있는 나라가 오히려 살인율도 높다. 국가도 죽이는데 시민은 왜 못 죽여? ‘재사회화’? 죽은 자를 어떻게 사회로 돌려보내? 사회계약론? 생명을 어떻게 계약의 대상으로 삼아?

몇년 전 사형수의 영혼을 돌보는 어느 장로님의 기사를 읽었다. 형장에 끌려가는 순간에 오히려 장로님의 다친 다리 걱정을 하더란다. 어느 수녀님도 비슷한 얘기를 들려주신다. 사형제도는 이렇게 죄인이 아니라 ‘더이상 죄인이 아닌 자’를 죽인다. 대체 무슨 권리로? 장로님은 체념한 듯 사형제도의 존폐는 그냥 “나라에 맡기기로” 했단다. 아니다. 이럴 땐 신을 카드로 사용해도 된다. ‘감히 국가가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기독교는 사형집행인의 도덕”? 꼭 그렇지 않다. 신은 ‘보복론’을 정당화하는 데에 사용할 수도 있고, 거꾸로 거기에 반대하는 데에 사용할 수도 있다. 사형제도 폐지를 위해 싸우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은 좋은 예이다. 신은 용도가 정해지지 않은 카드, 조커다. 아니, 카드가 아니라 그 카드의 올바른 용법인지도 모른다.

이 순간에도 처형을 기다리는 영혼들이 있다. 정말로 죄의식을 느껴야 할 자들은 누구일까? 동료 인간을 죽여야만 유지되는 우리 사회의 잘난 질서. 이 ‘마이너스 하나’의 안정과 평화. 이 원시 희생의식의 불편한 기억. 그리하여 원죄의식.

진중권

엑스 리브리스(ex libris)란 '∼라는 책에서'라는 뜻의 라틴어로, 책을 인용할 때 쓰는 말입니다. 진중권씨의 이메일 주소는 kyoko@zedat.fu-berlin.de입니다.

한겨레21 1999년 07월 08일 제2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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