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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
베트남전 24돌에 돌아보는 우리의 치부, 베트남 전범조사위의 끔찍한 기록들

(사진/베트남전에서 베트공의 진지를 수색·파괴한다는 작전상의 명분은 대량학살을 정당화시켜 주었다.)

전쟁은 이런 곳에서도 일어났을까. 둥근 어깨의 산등성이 그리고 초록의 들판, 그 위로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햇살, 야자수와 망고와 파파야, 바나나 나무들…. 창 밖을 흐르는 풍경엔 나른한 열대의 평화로움만이 펼쳐진다. 태양이 작열하는 들녘에는 허리를 땅에 엎디어 논밭을 일구는 베트남 여인네들의 삿갓모자만이 드문드문 섬처럼 떠간다. 한낮의 태양에 달구어져 엿가락처럼 휘어버릴 듯한 거리엔 허리를 곧추세우고 자전거를 달리는 여학생들의 하얀 아오자이 자락이 무거운 바람 속을 구름처럼 떠돌기도 한다. 과연 우리는 저토록 가녀린 몸피의 여인들에게까지 총부리를 들이댔을까. 이성은 간데없고 광기만이 오롯이 남은 인간들이 저지른 살육의 현장, 그 아픔의 속살을 헤집으려 나서는 한 ‘남추틴’(남조선)의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버스는 중앙선도 없는 아스팔트 위를 끝도없이 달렸다.

살아남은 노스님의 증언

"1969년 10월14일, 베트남 남부 판랑지역에서 남한 군인들이 린선(Linh Son)사 스님들을 향해 총기를 휘두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이공의 보고에 따르면 남한군 한명이 린선사에서 베트남 여성을 희롱하다 주지승에게 쫓겨나자 이에 격분, 동료들을 몰고 와 총기를 난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AFP 통신>은 이 사건으로 71살의 주지승, 69살의 노승, 41살의 여승, 15살의 행자승 등 4명이 사망한 사실을 베트남 정부가 공식 인정했다고 보도했다.(<인민군대>지 1969. 10. 24)"

(사진/당시 린선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푸 스님.)

필자는 2년 전, 베트남 정치국에서 나온 ‘전쟁범죄조사보고서- 남베트남에서의 남조선 군대의 죄악’이라는 자료의 일부를 어렵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자료를 아직은 검증되지 않은 베트남쪽의 일방적인 보고서, 그러나 언젠가는 풀어야 할 숙제로 책상서랍 안에 묵혀두고 있었다. 그리고는 ‘아버지 세대에 저질러진 잘못이지만’ 한국과 베트남간의 서로 죽고 죽여야 했던 ‘아픈 역사의 매듭을 풀기 위한’ 작은 노력의 일환으로 베트남을 방문한 한국 시민단체 ‘나와 우리’ 일행에게 처음으로 이 자료를 공개했다. ‘나와 우리’는 지난해에도 일본 시민단체가 띄운 피스보트(Peace Boat)에 올라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학살 현장을 돌아보며 증언을 채록한 바 있다. “일본인의 도움을 빌려 한국인의 문제를 되돌아본다는 사실이 가슴아팠다”는 그들은 이제 ‘한국인의 힘으로’ 부딪쳐보자는 의지를 모아 또다시 긴 여정에 오른 것이다. 필자는 첫 기착지인 판랑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베트남 남부 해안가에 위치한 판랑은 관광안내 책자에도 나오지 않는 조그만 고장이다. 가장 번화가임이 분명한 버스정류장에는 택시 한대 보이지 않고, 걸어서 찾아간 호텔에도 그 흔한 냉장고 한대가 없었다. 다만 ‘늑맘(베트남 생선소스)의 고장’이라는 명성답게 비릿한 소금기가 대기를 가득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 일행은 먼전 린선사를 찾아나섰다. 그러나 자료 속에 나와 있는 린선사는 전쟁통에 사라지고 없었다. 찜통 같은 더위와 너털거리는 버스에 시달리며 8시간이나 달려온 발걸음이 허탕이나 치게 되는 건 아닌가 조바심이 나면서도, 한편으론 왠지 모를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음날 아침, 우리 일행을 판랑까지 안내했던 베트남 학생에게서 급한 전갈이 왔다. 원래 호치민에서 판랑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서 있던 린선사는 전쟁중에 폭파됐고, 판랑에서 나창으로 가는 길에 같은 이름의 절이 다시 세워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달음에 그 절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당시 유일한 생존자인 푸(78) 스님과 현장 목격자인 응웬티유엔한(45)을 만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내 필자를 짓누르곤 했던 불안이, 부인하고만 싶었던 이야기가 눈앞에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아이건 산모건 사정없이…

(사진/'잊고싶은 전쟁'. 한국군에 죽은 베트남인의 숫자는 공식통계로만 4만1450명이다.)

“따이한 군인들이 먼저 스님들을 향해 총을 쏘았어요. 이어서 살려달라며 달아나는 여자 보살님에게도 총을 쏘았지요. 그리고는 시체를 모두 불태웠어요.” 유엔한의 증언이다. 당시 겨우 15살이던 그는 두려움에 질려 고함도 지르지 못하고 숨어만 있었다고 고백한다. 린선사는 모두 다섯 스님이 거처하는 자그마한 절이었다. 그때 푸 스님은 주지스님보다 먼저 마을에 내려가 초상집에서 독경을 읽고 있었다. 증언의 대부분은 유엔한을 통해 이뤄졌고, 그 절의 유일한 생존자인 푸 스님은 말이 없다. 당시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사람들은 그때 그 학살의 주인공인 따이한의 후예들을 살뜰히 배려한다. 시원한 차를 내오고, 과일을 깎아 권하고, 파파야를 먹느라 지저분해진 입을 닦으라고 물까지 받아다 줄 때는 울컥 눈물이 솟았다.

푸 스님이 마을에서 돌아왔을 때 절은 이미 난장판이 돼 있었다. 푸 스님은 불에 그을린 다섯 스님의 시신을 인근의 아오방 절로 옮겼다. 시신탈취에 대한 불안에서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판랑지역 전역의 학교가 휴학을 결의했고, 학생들과 불교도들이 일제히 봉기에 나섰다. “베트남 정부는 양민학살을 즉각 중단하라!” “따이한은 베트남을 떠나라” 등등 피맺힌 함성이 온통 판랑을 휩쓸었고, 스님들의 시신은 12일이 지나서야 화장할 수 있었다.

“화장을 하고도 스님들을 안식시켜드리지는 못했어요. 스님들을 모실 절이 사라졌기 때문이지요. 스님들의 뼈를 항아리에 고이 담아 모셔오다가 지난해에야 이 절에 안치해 드렸지요.” 푸 스님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남한 군인들의 총기난사 사건으로 폐허가 된 절은 그뒤 또다시 폭격을 맞아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는 지난해 불교도인 재미 베트남 동포의 도움으로 다시 절이 서게 됐다. 푸 스님은 30년 만에야 주지승으로 이 절에 돌아올 수 있었다. 절 옆으로 당시 죽음을 당했던 스님들의 유골이 모셔진 3층탑이 있다. 우리 일행은 그 앞에 고개를 숙이고 스님들의 명복을 빌었다.

어쩌면 우리가 린선사에서 들어야 했던 이야기는 지금부터 만나야 하는 수많은 증언들 중에서 가장 듣기 편안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대웅보전 자리에서 내려다보면, 하늘과 바다와 들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디에 눈길을 주어도 한없이 평화롭기만 한, 한없이 정겹기만 한 풍경들, 그러나 그 속엔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는 걸까. ‘나와 우리’ 일행은 한국군의 군사작전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됐던 중부지방으로 또다시 길을 떠나고, 필자는 연신 린선사를 뒤돌아보며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걸음을 되돌려 호치민으로 돌아왔다.

"여성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

한국군은 잔혹한 대량학살을 일삼아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조차 가급적 직접적인 교전은 피하려 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전선도 없고 적이 누군지도 모르는 베트남전에서 베트콩의 근거지를 수색, 파괴한다는 작전상의 명분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학살행위를 정당화시켜 주었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기록은 그 내용이 워낙 끔찍해 자세히 밝히기에 부담이 없지 않았지만, 그 일부를 여기에 소개한다.

1965년 12월22일, 한국군 작전병력 2개 대대가 빈딘 성, 퀴년시에 있는 투이프ㄱ 군, 프ㄱ호아 사(使), 턴지앙 촌에 500여발의 대포를 발사한 뒤 “깨끗이 죽이고, 깨끗이 불태우고, 깨끗이 파괴한다”는 구호 아래 수색소탕작전을 펼쳤다. 그들은 이 마을에서 12살 이하 22명의 어린이, 22명의 여성, 3명의 임산부, 70살 이상 6명의 노인을 포함, 50여명이 넘는 양민을 학살했다.

"… 랑은 아이를 출산한 지 이틀 만에 총에 맞아 숨졌다. 그의 아이는 군화발에 짓이겨진 채 피가 낭자한 어머니의 가슴 위에 던져져 있었다. 임신 8개월에 이른 축은 총알이 관통해 숨졌으며, 자궁이 밖으로 들어내져 있었다. 남한 병사는 한살배기 어린아이를 업고 있던 찬도 총을 쏘아 죽였고, 아이의 머리를 잘라 땅에 내동댕이쳤으며, 남은 물통은 여러 조각으로 잘라내 먼지구덩이에 버렸다.

그들은 또한 두살배기 아이의 목을 꺾어 죽였고, 한 아이의 몸을 들어올려 나무에 던져 숨지게 한 뒤 불에 태웠다. 그리고는 12살 난 융의 다리를 쏘아 넘어뜨린 뒤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넣었다…"

판랑에서 헤어진 지 이틀 만에 퀴년시를 조사중인 ‘나와 우리’ 일행에게서 전화가 왔다. “찾았어요! 당시 따이선 현 인민위원회 주석 말이에요.” 1966년 3월19일과 20일 이틀간에 걸친 ‘베트남 중부 각 성의 전쟁범죄조사회의’에서 남한 군대의 죄악상을 낱낱이 밝혔던 응웬탄퐁을 이르는 말이다. “손에 들고 있는 이 자료가 점점 두려워지는군요. 어쩌면 우리는 이 자료를 더 보충해야 할지도 몰라요. 빈딘성을 중심으로 이 자료에 소개된 네 지역말고도 한국군의 학살현장이 더 있다고 하는군요.” 당시 응웬탄퐁의 보고에 따르면 66년 1월23일부터 2월26일까지 약 한달 동안 맹호부대 3개 소대, 2개 보안대대, 3개 민간자위대에 의해 이 지역에서만 모두 1200명의 주민이 학살됐고, 그중에는 한명도 남김없이 몰살당한 가족이 8가구나 됐다. 또한 1535채의 가옥과 850만t에 이르는 양식이 불태워졌고, 649마리에 이르는 물소가 총탄에 맞아 죽거나 불태워졌다.

이러한 수색소탕작전은 일차적으로 융단폭격 등으로 작전지역을 공개하고, 한국군 등 지상군이 현장에 투입되어 마을에 남아 있는 주민들을 즉결처분한 뒤 집을 불사르고 불도저 등으로 마을 전체를 밀어버리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생존자들의 한국군에 대한 증언에서 공통되는 점은, 무차별 기관총 난사, 대량살육, 임산부 난자살해, 여자들에 대한 강간살해, 가옥 불지르기 등이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국군들의 양민학살 방식을 정리해보면 몇 가지 공통된 유형이 나타난다.

-주민들(대부분이 여성과 노인, 어린이들)을 한데 끌어모은 뒤 다시 몇개의 그룹으로 나눈 다음 기관총을 난사해 몰살시킨다.

-주민들을 한집에 몰아넣고 총을 난사한 뒤 집과 함께 죽은 자와 산 자를 통째로 불태운다.

-아이들의 머리를 깨뜨리거나 목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거나 사지를 절단해 불에 던져넣는다.

-여성들을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하고, 임산부의 배를 태아가 빠져나올 때까지 군화발로 짓밟는다.

-주민들을 마을의 땅굴로 몰아넣고 독가스를 분사해 질식사시킨다.

한국군의 대량학살이 자행된 곳에는 아이들의 입에 캔디나 케이크가 물려 있었다. 노인들의 입에는 담배가 물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마을사람들을 안심시키면서 한곳으로 모으는 한 수단이었던 듯하다.

과연 그대들에게 진정한 반성은 있는가

우리에게도 베트남전은 잊고 싶은 전쟁이다. 한국은 1964년 의료지원단과 태권도 교관 등 270여명을 사이공 남쪽 붕타우에 파견함으로써 베트남전에 군사적인 개입을 시작했다. 이후 65년에서 73년까지 약 30만명의 전투부대를 ‘베트남 정부의 요청’이라는 미명 아래 베트남전선에 투입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들도 4960여명이 전사했고 10여만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한국군은 또한 적군인 베트남인을 4만1450명이나 죽이는 전승(?)을 거두기도 했다. 아군 사망자수의 10배에 이르는 적군을 전사시킨 것이다. 그것도 공식적인 통계상으로만!

이제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종전 24년을 맞는 이 순간에도 지구상의 한켠에서는 새로운 총성이 울려온다. 한국에서는 코소보에서의 인권을 외치는 목소리도 높다. 20세기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21세기의 또다른 상처 하나를 낳고 있는 것이다. 가해자이든 피해자이든 상처받은 ‘오늘’을 치유하는 과정이 없이는 우리에게 미래가 없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양심에 칼을 대는 아픔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할지라도.

역사는 우리에게 의문부호 하나를 던져놓는다. 과연 그대들에게 진정한 반성은 있는가.

호치민·판랑=구수정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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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1999년 05월 06일 제2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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