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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안창호, 신채호…김일성!
전국의 인문·사회계열 교수가 뽑은 ‘20세기 한국의 정신사에 영향을 낀친 인물 10인’



(사진/김구 안창호 신채호 안중근 한용운 함석현 장준하 최현배 이광수 김일성(왼쪽 위부터 시계방향부터)

20세기 한국을 이끌어온 지성은 누구인가. 아직 지성사(知性史)가 제대로 정립돼 있지 않은 우리 현실에서 <한겨레21>은 이 문제에 조금이라도 해답을 얻기 위해 전국의 인문·사회과학 계열 교수들에게 “금세기 한국 정신사의 흐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해방 무렵에 머무른 우리의 지성사

이 설문조사의 결과는 흥미롭다. 어렴풋하나마 우리 역사에서 지성으로 꼽히는 이들의 덕목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을 엿보게 된 것이다. <한겨레21> 설문에 대한 교수들의 답변은, 사상적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거나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이룩한 인물보다 동시대인들과 호흡하며 시대를 이끌어간 인물에 더욱 강조점이 두어졌다. 나름의 사상적 완결성과 체계를 갖추었느냐에 대해선 다소 의문의 여지가 있더라도, 시대정신을 대변하며 ‘창조적 실천’을 해온 인물들이 전체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런 점에서 백범 김구 선생이 압도적인 비율로 ‘20세기 정신사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꼽힌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 보인다. 사상가라기보다 정치지도자에 가까운 백범은 역사 속에서 민족자주를 위한 실천을 치열하게 전개한 점에서, 많은 응답자들로부터 한국 민족주의의 정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백범 다음으로 우리 정신사에 영향을 끼친 인물로는 도산 안창호, 단재 신채호, 안중근, 만해 한용운, 함석헌, 장준하, 외솔 최현배, 춘원 이광수, 김일성 북한 주석 등이 꼽혔다. 안중근 의사는 테러라는 극한 방식으로 항일투쟁의 최전선에 섰고, 신채호·안창호 선생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독립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던 이들이라 할 수 있다. 또 만해 한용운은 종교와 문학을 통해 식민지시대 극복에 헌신한 점을 높게 꼽았다. 안중근 의사를 비롯해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이들이 대체로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20세기를 관통하며 한국인들의 마음에 가장 다가왔던 사조가 민족주의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뒤집어 말하면, 21세기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도 우리의 지성사가 아직 해방 무렵의 시기에서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해방 이후 온전한 민족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여전히 분단상황에 처해 있는 현실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한 민족의 의식을 형성하는 데 말과 글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느 정도일까. 외솔은 해방 이후 우리말에서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한글전용의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우리 정신사에 한획을 그은 인물로 꼽혔다. 일제 말기에 변절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춘원이 한국 정신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선정된 데엔 그의 근대문학에 끼친 공로뿐 아니라 우리나라 근대화의 한 상징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함석헌 선생을 20세기의 대표적 지성으로 꼽은 이들은 대체로 그가 행동하는 종교인의 전범, 기독교를 한국혼에 접목했다는 점을 평가했다. 장준하 선생은 해방 이후 민족주의의 맥을 이었을 뿐 아니라 50∼60년대 척박한 지적 풍토 속에서 <사상계>를 창간하며 당시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 높게 평가됐다.

동시대 지식인 평가는 상당히 유보

20세기 한국 정신사의 흐름에 커다란 영향을 준 인물로 김일성 북한 주석이 꼽힌 점도 눈에 띈다. 나름의 이론체계를 갖춘 주체사상을 통해 반세기 동안 한반도 반쪽의 정신적·물질적 삶을 이끌어왔다는 점에서 보면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많은 교수들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이란 단서를 달면서도 그를 추천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아직도 남한의 많은 이들에게 극히 부정적 이미지로 남아 있는 김 주석이 꼽힌 사실은, 예전과는 달라진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

‘20세기 한국 정신사의 흐름에 영향을 끼친 인물 10인’에 든 사람 중 생존한 이는 없다. 김지하 리영희 백낙청 등이 10인의 인물 바로 바깥에 위치해 있다. 이는 70년대 이후 사회 참여에 적극적이었던 지식인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아직 제대로 내려지지 않았음을 뜻한다. 설문에 응한 한 교수는 “자신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지성에 대한 평가는 원래 어려운 법”이라며 “70년대 이후 우리 정신사를 이끈 인물들에 대한 평가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겨레21> 조사결과는 기존의 신문·방송 등에서 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지성사의 흐름에 비중을 둔 만큼,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을 뽑았던 기존 조사와는 적지 않은 차이가 존재한 것이다. 대표적인 게 정치인에 대한 평가다. 이번 설문조사에서 정치지도자 가운데 열 손가락에 꼽힌 이는 남북 통틀어 김구와 김일성뿐이다. 각종 조사에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또는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인물) 1위로 뽑혔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정신사적인 영향력 면에선 20위권에 간신히 들었다. <한겨레21> 설문조사에서 김구와 김일성 두사람이 꼽힌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김 주석에 대한 역사적 평가야 어떻든, 그는 항상 민족해방을 최우선에 둔다고 말했던 인물이다. 고답적이긴 하지만 ‘민족’이란 단어가 금세기 우리들에게 끼친 영향을 짐작해볼 수 있다. 박 전 대통령은 경제 분야에서의 업적을 평가할 만하지만, 경제적 업적만큼 그의 정치사상이 우리 민족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지성평가 ‘여론조사’의 한계

이번 설문조사가 갖는 한계는 물론 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 지식인이라 할 만한 대학교수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이긴 하지만, 흡사 여론조사하듯 지성을 평가하는 방식의 문제는 있다. 이런 방식은 대중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으나 사상·학문적으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이들을 빠뜨릴 여지가 충분하다. 우리나라 사회경제사의 태두라 할 백남운이나, 항일투쟁 과정에서 좌익과 우익을 한데 묶는 통일전선론을 주창했던 안재홍, 민중사의 관점에서 본격적인 대하소설의 전범을 제시한 작가 홍명희 등이 비교적 낮은 평가를 받은 것은 이를 보여주는 한 사례다.

하지만 사상을 일정한 역사환경 속에서 다듬어지는 사회적 산물로 본다면 지성사(intellectual history)를 사상사(history of ideas)가 아니라, 시대와 호흡하며 시대를 열어간 이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도 의미있는 작업일 것이다.

박찬수 기자

pcs@ma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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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1999년 03월 25일 제2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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