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특집Ⅰ . 현대 걸리버 대우증권 대한항공
 

가라! 남자 세상, 오라! 사랑할 권리
감춰진 소수에서 여성운동의 전위로…고개드는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사진/지난 6월27일 서울 종묘공원에서 열린 한동협 출범식. 동성애자 인권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한동협 출범은 레즈비언들이 주도했다.)

페미니스트 카페 ‘고마’, 여성 전용바 ‘라브리스’, 레즈비언 카페 ‘레스보스’ 등 페미니스트와 레즈비언들의 집결지는 주로 서대문구와 인접한 마포구에 몰려 있다. 20년 전 전국 최초로 여성학과가 개설되면서 페미니스트의 배출구가 됐던 이화여대 근처다. 레즈비언 단체 ‘끼리끼리’도 예외가 아니다. 아현 고가도로가 이화여대쪽으로 끝나는 지점에서 우회전해 들어간 골목길에 이 금남의 집이 자리잡고 있다.

두개의 벽, 여성 차별과 동성애 차별

“아, 보지다방 말이죠?” 끼리끼리 교육간사 지혜(28)씨는 ‘컨트 카바레’에 대해 묻자 대뜸 용어부터 수정하고 나섰다. “여러 페미니스트 단체에서도 쑥스러운 듯 ‘보지’라는 말을 빼고 그냥 다방이라고 그러더라구요.”

(사진/페미니스트 카페 고마. '여성 연대의 틀' 마련이 다방을 연 목적이다.)

일반인은 물론 자칭 페미니스트들마저 쉽게 입에 올리지 않는 이 단어를 당당하게 거론하면서 상대방에게 문화적 충격을 가하는 이들로부터 분명 기존 페미니스트와는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라는 정의를 통해 분명해졌다. 지혜씨는 지난해 겨울 이화여대에서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를 주제로 석사 학위논문을 썼다.

레즈비언과 페미니스트는 분명 다르다. 레즈비언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여성 동성애자를 뜻할 뿐이다. 레즈비언은 여자에게만 해당되지만 페미니스트는 남자도 ‘회원가입’이 된다. 또 페미니스트라고 다 레즈비언일 수 없고 동성애를 즐기는 레즈비언이 곧바로 페미니스트일 수 없다.

그러나 둘이 겹치는 교집합은 있다. 레즈비언이면서 동시에 페미니스트인 경우다.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서구에서는 이것이 페미니즘의 한 조류로 굳어지고 있다.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는 기본적으로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남성 중심에다 이성애 중심인 사회에서 그들은 페미니스트 중에서도 소수일 수밖에 없고, 그만큼 현실사회와 타협의 여지가 적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성의 조화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혜씨는 “두 용어가 동의어도 아니고 레즈비언 페미니즘이 래디컬 페미니즘의 한 조류라고 볼 수도 없다”고 말한다. 동성애 차별과 여성 차별의 근원을 가부장제 중심 또는 남성 중심 사회로 보는 것은 일치하지만, 레즈비언 페미니즘은 레즈비언니즘을 강조하고 래디컬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을 강조하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서로 연대할 수도 있고 경합을 벌일 수도 있는 관계라는 것이다.

IMF를 패러디할 때 일반 페미니스트들이 ‘I aM Fucked’(강간 당했어)를 즐겨쓴다면 한국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의 선두 주자격인 ‘끼리끼리’의 눈에는 ‘International Men’s Fucking’(남자 위주의 성관계가 판치는 세상)이다.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의 박미라 편집장은 “실제로 레즈비언들은 페미니스트들이 남녀 차별에는 민감하지만 이성애 중심 사회에는 알게 모르게 빨려들어가고 있다는 불만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지혜씨는 한발 더 나아가 ‘레즈비언/페미니즘’을 주장한다. 큰 범주에서는 레즈비언 페미니즘에 속하지만 두 단어 사이에 빗금을 쳐둔 까닭이 있다. 가부장제(남성) 중심의 사회구조가 바뀐다고 동성애 억압이 풀리지는 않는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이성애 중심의 문화도 함께 바꿔 나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레즈비언 페미니스트가 세력화하기 어려운 여건이었다. 페미니스트라는 용어는 70년대에 국내에 유입됐고 78년 이화여대에 여성학과가 생긴 이후 지금은 전국 6개 대학에 여성학과가 있다. 페미니즘이 이제 성인이라면 레즈비언 모임은 아직 갓난아기. 끼리끼리가 최초의 레즈비언 단체다.

국내 인권운동에 참여하던 ‘사포’(Sappo)라는 주한 외국인 레즈비언 모임에 한국인이 동참해 한국인 동성애자 모임 ‘초동회’(93년)와 ‘친구사이’(94년)로 발전했고 여성 동성애자들이 94년 친구사이에서 갈라져 처음으로 끼리끼리를 만들었다. 레즈비언 단체는 현재 6개 정도 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호회 수준을 넘어 인권단체를 표방하는 곳은 끼리끼리뿐이었다.

김은실 이화여대 교수(여성학)는 “서구에서처럼 레즈비언도 정체성을 인정받는 공동체가 필요하지만 아직 멀었다. 이러한 레즈비언 커뮤니티가 없는 상황에서는 레즈비언을 페미니즘과 관련해 의제화하기는 어려웠다”고 말한다. 지금까지는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이 개별화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양성애자, 여성 동성애자, 이성애자가 섞여 있는 페미니스트 단체에 개별적으로 들어가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최근 레즈비언 페미니즘이 해돋이의 기미가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흩어져 있던 동성애자들이 하나로 뭉쳤다. 지난 6월27일 오후 5시 서울 종묘공원에서는 한국동성애자단체협의회(한동협)가 출범했다. 23개 동성애자 단체가 모인 이날 이들은 인권보호 촉구를 주내용으로 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소극적인 친목 모임에서 인권운동으로 진일보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게다가 한동협 출범의 주도자들은 대부분 레즈비언들이다. 한동협을 결성하자고 처음 주장한 동성애자 잡지 <버디>의 한채윤(27)씨와 편집진은 모두 여성 동성애자들이다. 끼리끼리도 보지음악다방 행사 준비 탓에 한동협 결성엔 겨우 짬을 낸 정도지만 마음으로는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레즈비언과 페미니스트단체들이 처음으로 대거 한곳에 모이는 보지음악다방이 주목된다. ‘보지’는 여성을 상징하지만, 여성을 포함한 이성애자와 달리 여성 동성애자들만의 공통분모이기도 하다. 보지음악다방에는 남자의 출입이 금지되지만 페미니스트 단체들은 초청됐다.

레즈비언의, 레즈비언에 의한…

이벤트를 제안했고 행사진행을 맡은 지혜씨는 처음에는 페미니스트와의 연대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일부 언론의 보도태도 때문에 자칫 자신들이나 페미니스트 단체에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조심성 때문이었다. 보도 자료용이 아닌 초청문에는 페미니스트 단체들에 “서로 만나자”고 하고 있고 인터뷰 도중에도 “여성 연대의 장 마련이 모임의 취지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제 첫발을 딛는 소수 페미니스트로서의 염려 때문인 듯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레즈비언 주도의 페미니즘, ‘레즈비언의, 레즈비언에 의한, 레즈비언을 위한 여성연대’는 분명 기지개를 켜고 있는 중이다.

송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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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1998년 07월 09일 제2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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