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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뛰어넘은 환희!
비화 중심으로 엮어본 남북 정상회담의 숨가빴던 2박3일 드라마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은 발표된 내용만으로도 큰 충격과 감동을 안겨주었다. 두 정상의 말과 표정, 움직임 하나하나는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전체 그림의 조각’에 지나지 않은 듯하다.

김 대통령은 6월15일 귀국보고회 자리에서 “여러 가지 양해된 좋은 일이 있으나 (밝히기에) 적당한 시기가 아니다”고 말했고, 김 위원장도 고별오찬 행사에서 “(우리 둘 사이의 얘기는) 알릴 것도 있고, 알리지 못할 것도 있다”는 의미있는 말을 던졌다. 두 사람간에 알려지지 않은 많은 깊숙한 대화가 오갔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지금으로서는 두 사람이 나눈 대화내용을 모두 확인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평양방문 수행원들의 입을 통해서 남북정상회담의 숨겨진 뒷이야기들이 하나둘씩 밝혀지고 있다. 이들이 전하는 비화를 중심으로 숨가빴던 정상회담을 시작부터 끝까지 재조명해본다. 편집자

분단 이후 처음으로 ‘대한민국’과 ‘REPUBLIC OF KOREA’라는 문구와 태극마크가 선명하게 새겨진 대통령 특별기가 6월13일 오전 10시27분 평양공항에 내려앉고 나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맨 처음 목격한 사람은 다름 아닌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김 대통령은 기내 창문을 통해 점퍼 차림의 김 위원장이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용순 아태평화위 위원장 등 북쪽 지도부와 함께 특별기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본 것이다.

“새총으로 빨간불을 깨뜨리며 나간다”

(사진/환한 웃음 속에 공동선언 합의를 알리는 두 정상. 이 웃음이 있기까지는 입이 바짝 타들어가는 상황들이 숨어있었다)

사실 남쪽은 평양공항에 도착할 때까지도 김 위원장의 공항 영접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물론 남쪽도 김 위원장이 공항에까지 마중을 나올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어렴풋이 했다. 김 대통령이 평양공항에 도착해 직접 도착성명을 발표할 계획을 세운 것을 북쪽이 만류하면서 대변인 등을 통해 서면으로 발표하도록 요청한 게 판단의 근거였다. 이런 판단은 김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하지만 결코 확신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김 위원장이 직접 영접나온 사실은 심지어 평양에 미리 선발대로 가 있다가 평양공항에 마중나온 외교부 의전장까지도 까마득하게 몰랐다. 비행기가 평양공항에 도착한 뒤 김 대통령이 탄 비행기에 올라온 의전장에게 남쪽 수행원들이 맨먼저 물어본 것도 “누가 영접을 나왔느냐”였다. 그러나 의전장의 대답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말이 되느냐”는 질문이 쏟아진 것은 물론이다. “저쪽이 알려주지를 않습니다.”

당시 평양공항에는 김 위원장이 이미 도착한 상태였다. 그러나 의전장은 김 위원장이 모습을 드러내기 직전에 비행기에 올라 그가 영접나온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남쪽 수행원들이 영접 나온 인물을 몰라 애를 태우고 있는 바로 그 순간 김 위원장은 북한 환영인파들의 박수와 연호를 받으며 김 대통령이 탄 비행기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김 대통령이 가장 먼저 발견하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저기 오는구만.”

실제 김정일 위원장은 15일 고별오찬에서 공항 영접에 대한 뒷이야기를 스스로 풀어놓았다. “내가 공항환영 나가는 것을 김용순 비서가 말렸는데 나갔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주변에서 빨간불을 켠다. 내가 새총으로 빨간불을 모두 깨뜨리면서 나간다”고 말해 공항 영접을 둘러싸고 북한 내부에서도 적지 않은 진통이 있었음을 내비쳤다.

김 대통령 일행이 공항을 떠나 백화원영빈관으로 향할 때 평양시민들은 “만세” “김정일” 결사 옹위”를 끊임없이 외쳤다. 그러나 한때 알려진 것과는 달리 “김대중” 연호는 없었다. 그러면 당시 환영나온 인파는 정확히 얼마나 될까. 김용순 대남담당 비서는 60만명 정도라고 추산했으나 인원동원 실무에 밝은 한 인사는 “실제로는 80만명에 이른다”고 말했다(<노동신문>은 80만명이라고 보도했다). 실무접촉 대표로 나왔던 김령성 최고인민회의 참사는 “보통 시내에 군중조직을 할 때 사람들을 두줄로 늘어세우는데 이번에 김 대통령을 환영할 때는 군중이 겹겹이 늘어섰고 보통의 경우와 달리 중간에 빈 곳도 없었다. 이를 감안하면 60만명보다 20만명은 더 나왔다”면서 “김 대통령에 대한 대접은 과거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의 평양방문 때보다 더 융성했다”고 말했다.

그러면 이런 외형적인 환영일색의 분위기처럼 남북정상회담도 처음부터 순항했을까?

김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와 귀국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때로는 절망적인 생각을 가질 때도 몇번 있었다”고 말했다. 16일 오전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도 “일정도 불분명했다. 절망적인 생각도 두세번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 김 대통령이 말한 ‘절망적’ 상황은 무엇이었을까.

맛 느낄 여유도 없었던 옥류관 냉면

김 대통령은 13일 오전 11시40분께 백화원영빈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김 위원장과 1차 정상회담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김 위원장은 김 대통령에게 청천벽력 같은 말을 던졌다고 한다. 김 위원장은 북한에 대한 남쪽 일부 세력의 비우호적인 분위기 등을 거론하면서 “대접은 융숭하게 잘하겠으나 구체적인 성과는 기대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시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산가족 문제를 비롯해 남북간의 현안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도출은 어렵다는 통고였던 셈이다. 김 대통령 일행으로서는 맥이 탁 풀리는 순간이었다.

“앞이 캄캄했다. 다음날 공식수행원들이 대통령과 함께 아침식사를 같이 할 때 다들 한숨만 쉬었다.” 김 대통령을 수행했던 한 인사의 회고다.

김 대통령은 1차 정상회담을 마치기가 무섭게 임동원 특보에게 북한의 김용순 아태평화위 위원장과 막후협상을 하도록 지시했다. “도저히 그냥 돌아갈 수 없다”는 입장을 김 위원장에게 전달토록 한 것이다.

13일 밤과 14일 새벽 사이 임동원-김용순 막후협상라인이 밤새 가동됐다. 이 라인을 통해 김 대통령의 뜻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전달됐다. 남쪽은 정상회담 시간을 충분히 갖기 위해 가급적 오후에 회담을 열자고 제안했다.

북쪽은 13일 저녁에 다음날 일정을 통보하면서 오전 일정은 알려줬으나 오후 일정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오후 일정이 비어 있는 점에 미루어 정상회담이 열릴 것이라는 점만은 확신할 수 있었으나 구체적인 시간 장소가 통보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또 회담이 열리더라도 구체적인 성과가 없이 돌아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남쪽 수행원들의 머리를 무겁게 짓눌렀다.

둘쨋날인 14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대표로 한 북쪽 인사들과의 공식면담에서도 분위기가 반전되는 낌새는 전혀 없었다. 이날 정오가 다 돼가는데도 북한쪽에서는 2차 단독회담의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알려오지 않았다. 남쪽 수행원들로서는 초조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에서의 오찬도 남쪽 일행만의 식사였다. 한 참석자는 “맛있기로 소문난 평양냉면이었지만 제대로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북한쪽에서 정상회담 시간을 통보해온 것은 김 대통령과 수행원들이 점심식사를 하던 오후 1시50분께였다. 시간도 촉박했다. “2시에 만나자”는 전갈이었다. 식사중이어서 도저히 2시까지 백화원영빈관에 도착할 수 없다고 판단한 남쪽 관계자는 회담시간을 3시로 연기할 것을 제의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어떤 결심이 선 듯 “좋다. 모든 현안을 다루겠으니 남쪽 대표들 다 들어오라”고 전해왔다. 북쪽에서는 김용순 대남담당 비서만 배석하겠다는 말도 덧붙여졌다. 김 위원장은 남쪽 공식수행원 모두가 들어오기를 바랐지만, 남쪽에서는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면서 임동원 대통령 특보와 황원탁 외교안보수석, 이기호 경제수석만 배석시켰다. 드디어 이날 오후 3시부터 2차 단독정상회담이 시작됐다. 한 공식 수행원은 “이날 하루는 마치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천당으로 올라가는 기분을 맛본 하루였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이 말을 아낀 세 가지 이유

(사진/평양 가도에서 꽃술을 흔들며 "만세" "김정일"을 외치는 평양시민들)

이번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 기간중에 한 가지 눈에 띄었던 점은 김 대통령의 말수가 매우 적었던 점이다. 사실 김 대통령은 누구와 만날 때 너무 말이 많은 것이 탈이라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달변이다. 그런데도 공개석상에서 김 위원장과 만날 때 주로 말을 하는 사람은 김 위원장이었다. 수행원으로 참가한 한 인사는 “김 대통령을 안 지가 30년이 넘었는데 그처럼 말을 적게 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고 말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김 대통령의 이런 모습은 이미 평양으로 떠나기 전부터 결정된 전략이었다고 설명했다. ‘공개된 자리에서는 최대한 말을 아끼고, 비공개 회담에서는 최대한 할 이야기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떠났다는 설명이다. 공개된 자리에서 말을 아끼기로 한 이유를 김 대통령은 세 가지로 설명했다고 한다. “이번 회담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김정일 위원장을 띄워주는 것이다. 따라서 김 위원장이 주로 말을 하도록 하겠다. 둘째는, 저쪽은 나를 잘 아는데 나는 저쪽을 잘 모른다. 셋째는, 저쪽은 나이가 적고 나는 나이가 많은데 나이 적은 사람이 활발하게 말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실제 김 대통령이나 김 위원장이나 2차 정상회담에서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한 것으로 보인다. 회담이 예상보다 훨씬 길어지면서 오후 7시로 예정됐던 김 대통령 주최 만찬도 8시로 연기됐다. 그리고 남북한 화해와 통일 문제 등에 관한 4개항에 대략적인 합의가 이뤄졌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실질적인 밀고당기기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공동선언문 작성이 말처럼 쉽지 않았던 것이다. 양쪽의 밀고당기기는 김 대통령 주최 만찬장에서도 계속됐다. 김 대통령을 수행한 한 장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공식수행원들은 입이 바짝 마를 지경이었다. 오후 9시30분에 서명을 한다고 해놓고서 8시부터 만찬에 들어갔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만찬장에서도 계속 협상이 진행됐는데, 정말 웃기는 광경이었다. 멍석 깔아놓고 동네잔치하는 분위기에서 공동선언 작성을 위한 협상이 이뤄졌으니 한번 상상을 해보라. 통상적인 정상회담 형식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선언서 문안 작성에 남쪽에서는 임동원 대통령 특보, 황원탁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등이, 북쪽에서는 김용순 대남담당 비서와, 문장가로 알려진 림동욱 노동당 제1부부장(대남담당) 등이 참여했다. 만찬 뒤 자리를 계속 비우던 김용순 비서가 밤 9시18분께 들어와 김 위원장한테 사각봉투를 열고 석장쯤의 서류를 건넸다. 김 위원장이 그것을 읽어본 뒤 귓속말로 뭔가를 지시했다. 잠시 뒤 김용순 비서가 서류를 김 대통령 옆에 있던 임동원 특보에게 전달했고, 임 특보는 이를 김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김 대통령은 서류를 훑어본 뒤 손으로 몇 군데의 수정을 지시했다. 밤 9시30분께 양쪽 정상의 의견이 가미된 서류를 건네받은 문건 작성팀은 막바지 의견조율에 들어갔다. 1시간 뒤쯤 이번에는 임 특보와 송호경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20분쯤 뒤 임 특보가 돌아왔고, 계속 자리를 비웠던 김용순 비서가 바로 뒤따라와 자리에 앉은 뒤 김 국방위원장에게 또 뭔가를 보고했다. 드디어 김 위원장이 포도주잔을 들고 김 대통령에게 가서 건배를 제의했다. 김 대통령은 김 위원장을 데리고 연단으로 나가 “우리 두 사람이 공동선언에 완전히 합의했습니다. 모두 축하해 주십시오”라며 김 국방위원장의 팔을 번쩍 들었다. 우렁찬 박수가 만찬장에 울려퍼졌다. 이때 시각이 밤 9시49분. 역사적인 ‘6·15 공동선언’의 옥동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정작 이 역사적인 순간을 보도할 기자들이 그 자리에 한명도 없었다. 기자들의 만찬장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박선숙 청와대 부대변인이 박준영 대변인과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상의하자, 김정일 위원장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박 대변인이 “두분이서 손을 든 장면을 기자들이 찍지 못해 야단났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김 대통령한테 “그러면 우리 배우 노릇 한번 더 합시다”며 연단으로 나가 다시 포즈를 취했다.

나중에 김 대통령은 이날 단독정상회담을 두고 “회담시간 3시간50분 가운데 3시간40분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80년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언도를 받았을 때를 빼고 아마도 가장 긴 하루였다”고 술회했다. 그렇다면 회담 과정에서 어떤 쟁점이 가장 어려웠을까.

“선언이냐 성명이냐” 옥신각신

남쪽 공식수행원들의 말을 들어보자. “단독회담에서는 통일방안 논의가 가장 까다롭게 오래 시간을 끈 의제였다. 이 대목에서는 김 위원장이 김 대통령 얘기를 많이 들은 것으로 안다. 그래서 얻어낸 게 고려연방제를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바꾼 것이다. 북한이 7·4남북공동성명에서처럼 통일 문제를 ‘외세의 간섭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한다’에서 ‘외세의 간섭없이’란 문구를 달지 않은 것도 김 대통령의 설득 결과다. 김 대통령은 ‘주변 4대 주변국의 협조 없이는 아무것도 못한다. 통일을 이루는 데도 이들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비전향 장기수 문제도 상당히 까다로웠다. 공식적으로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오고 싶어하는 양심수나 국군포로가 없는 것으로 돼 있기 때문이다. 이런 껄끄러움을 ‘인도적 차원’이라는 말로 일단 녹였다. 이산가족 교환방문 문제는 이외로 쉽게 의견의 일치를 본 것으로 안다.”

주한미군 문제도 당연히 거론됐다. 김 대통령은 “현실적으로 주한미군이 나가라고 해서 나가겠느냐.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주한미군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아의 안정을 위해 필요한 존재”라고 설득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김 위원장도 주한미군의 필요성을 어느 정도 수긍했다는 이야기가 비공식적으로 흘러나오고 있는 점이다. 김 위원장은 “주한미군이 지금 필요하지요. 동북아 안정 유지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으로 압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남북 정상간의 합의를 ‘선언’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성명’으로 할 것이냐를 두고도 옥신각신했다. 북쪽은 줄곧 ‘성명’으로 표기할 것을 주장했으나 김 대통령은 “과거 7·4공동성명 등 성명은 많이 나왔으나 실천이 없었다. 만날 성명만 발표하면 뭐 하느냐. 실천이 있어야 한다. 역사적 선언으로 하자”고 주장해 결국 ‘선언’으로 확정됐다.

그래도 선언서의 마무리는 쉽게 되지 않았다. 우선 선언서 서명 주체 문제였다. 김 위원장은 자신이 형식적 국가원수가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서명자를 김대중 대통령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할 것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상부의 명을 받들어 임동원 국가정보원장과 김용순 아태평화위 위원장이 하는 것으로 하자”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마저 김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자 결국 “전라도 고집은 알아줘야겠다. 합의하겠다”고 자신의 서명을 수락했다고 한다.

김정일 ‘제주도 방문’ 제시하기도

(사진/평양에서의 작별. 그러나 두 정상은 곧 서울에서 다시 만난다)

김 위원장은 애초 서울 답방에도 난색을 표시했다고 한다. 김 대통령이 “김 위원장이 서울에 와야 우리 민족이나 세계사람들이 남북관계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믿는다”는 등의 근거를 들어 설득하자 이번에는 서울 대신 제주도를 방문하면 어떻겠느냐는 대안도 제시했으나 결국 서울 방문에 합의했다.

김 대통령은 서울 방문 초청시기와 관련해서는 10월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달은 서울에서 아시아유럽정상회의(아셈)가 열리는 시기다. 김 대통령은 김 위원장을 아셈에 초청하는 형식으로 서울을 방문하도록 해, 자연스럽게 김 위원장을 공식적으로 국제무대에 데뷔시키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는 게 정부 핵심 관계자의 귀띔이다. 김 위원장은 15일 고별오찬에서 안주섭 청와대 경호실장에게 “서울가면 나 경호실장에게 신세 많이 질 거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안 실장은 “서울 오시면 완벽하게 잘 모시겠다”고 대답했다.

김 위원장이 “탈북자”라는 단어를 사용한 장면이 텔레비전에 방영돼 이채를 띠었는데, 남한을 ‘대한민국’이라고 공식적으로 호칭한 것도 매우 주목되는 대목이다. 김 위원장은 15일 고별오찬 도중 “19세기 일본은 은단을 전세계에 보급했는데, 김치를 전세계에 보급한 것은 대한민국의 공헌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남쪽의 한 수행원은 “김 위원장이 이번 회담 과정에서 한번쯤은 ‘대한민국’이라는 말을 사용하려고 애초부터 마음먹고 있다가 김치 보급을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이란 용어를 사용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북한이 당면한 환경과 개발 문제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음을 내비쳤다(김 위원장은 다른 대목에서도 여러 차례 “고민”이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서울의 신문들을 보니까 기자어른들이 평양시내가 한적하다고 썼던데, 한적하다는 말은 뭐가 없다는 의미 아닙니까. 나는 수입차의 10분의 1만 평양에 들어오도록 허락했어요. 자동차가 많이 들어오면 도시를 망칩니다. 서울이 교통 문제 때문에 못쓰게 됐습니다. 미국 뉴욕이 그게 쓰레기통이지 사람사는 곳입니까. 워싱턴을 보세요. 차가 많지 않다보니 숲이 많고, 공기도 맑고, 사람살기에 좋은 곳입니다. 왜 워싱턴을 따라가지 않고 뉴욕을 좇아갑니까.”(14일 목란관 만찬장에서) 그는 또 금강산 관광개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저는 관광 싫어요. 이태리 회사에 용역을 줘서 조사를 시켰는데, 금강산도 오염될 우려가 있다고 합니다. 김 대통령 계신데 미안한 말이지만 설악산은 완전히 쓰레기 오물덩어리라고 하던대…. 달러냐 환경보전이냐 고민입니다. 후대한테 제대로 된 것을 물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상회담 마지막날인 15일 고별오찬. 이 자리에서 김 위원장은 자신이 품고 있던 생각들을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남쪽 수행원들이 깜짝 놀랄 만한 말들이었다. 그는 우선 남쪽에서 20만t의 비료지원을 해준 데 고마움을 표시했다. “남쪽에서 비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만약에 곡식이 클 때 비료를 안 줬다면 우리 인민들이 올해 또…(김 위원장은 이 대목에서 손가락 빠는 시늉을 했다). 영삼 정부 시절 같았으면 지원요청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김대중 대통령 정부이기 때문에 급할 때 꿔쓰고 갚으면 되니까 도와달라고 이야기해보라고 내가 지시했습니다. 정말 요긴하게 잘 썼습니다.” 전력지원 요청도 나왔다. “전기도 부족합니다. 지방 특히 황해도 농촌은 전력 사정이 매우 안 좋습니다. 불이 깜빡깜빡하고…. 시급히 해결해야 합니다. 남쪽에서 남는 전기가 있으면 주십시요. 없으면 할 수 없구요.” 그러면서 금강산 물을 남쪽에 보내겠다는 말도 했다. “금강산에는 좋은 물 있습니다. 갖다 쓰십시오. 군대를 바짝 동원하면 당장 남쪽에 많은 물을 보낼 수 있습니다. 군대는 그냥 놀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가만히 놔두면 적이 누군지 찾습니다. 군대는 그저 쉬지 않고 일을 하게 해야 합니다.” 모두 툭툭 던지는 식의 제안들이었으나,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일 대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정상회담 뒤 정부가 곧바로 북한에 대한 전력 지원 문제를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한 것도 김 위원장의 이런 요청에 따른 것이다.

“베이징 접촉은 사대적이다”

김 위원장은 또 남북간의 각종 접촉이 그동안 중국 베이징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베이징 무대를 쓰지 맙시다. 불편해서 하고 있기는 하지만 역시 베이징은 ‘사대적’입니다. 늘상 연락할 수 있는 체계를 가집시다”라고 말했다. 앞으로 남북 당국간 접촉이 한반도 내에서 이뤄질 전망을 밝게 해주는 대목이다.

미국 등 주변국이 가장 관심을 쏟고 있는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과 관련한 김 위원장의 속내도 이날 오찬에서 드러났다. 그는 황원탁 외교안보수석이 “빌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 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하게 돼 있다. 이들이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는 문제가 북의 핵과 미사일 개발 문제인데, 북쪽 입장을 어떻게 설명하면 되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변했다. “곧 열릴 북·미회담에서 해결날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달라.” 황 수석이 미국쪽에 전달한 ‘김정일 위원장의 메시지’인 셈이다.

김 위원장은 이날 고별오찬에서 “고민이 하나 있다”고 운을 뗀 뒤 “오늘 아침 군사위원회 일꾼들한테 ‘당장 10일 앞으로 다가온 6·25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쪽에서 6·25에 대해 종전처럼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군사위 일꾼들이) ‘남쪽에서 안 그러는데 우리만 그럴 수 있느냐’고 나오더라”며 “50년 동안 적대관계에 신물이 날 텐데도 군인들은 항상 상대방은 적으로 생각하니, 이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갖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남쪽 수행원들을 향해 “임동원 특보, 박재규 장관, 박지원 장관. 그것을 잘 조절하시오. 그거 잘 안 되면 어제 공동선언 또 휴짓조각됩니다. 조절 잘못하면 내가 남쪽 가서 장관 하갔어”라고 말해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은 “그렇게 안 돼야죠. 너무 염려마십시오”라고 화답했다. 역사적인 정상회담은 그렇게 서서히 막이 내리고 있었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한겨레21 2000년 06월 29일 제3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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