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표지이야기
 

양민학살, 중앙정보부에서 조사했다
해병 제1대대 1중대 장교들의 최초증언… 후송시킨 민간인 사살 문제되자 박정희 격노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여보세요. 여기는 <한겨레21>입니다. 선생님, 혹시 베트남전에 참전하지 않으셨습니까?” <한겨레21> 취재팀의 이 전화 한통이 걸려오는 순간, 그들은 무엇인가를 ‘직감’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번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던 그 일들을 어슴푸레 떠올리기 시작했다.

주검 사진 보여주며 조사

(사진/1969년 가을 중앙정보부에 소환돼 조사를 받은 장교들. 윗쪽부터 1소대장 최영언(해병간부후보 35기), 2소대장 이상우(해병간부후보 36기), 3소대장 김기동(해병간부후보 37기)씨)

1969년 11월 어느 날. 해병 제1사단 포항 상륙전기지사령부 최영언 중위(당시 27살)는 해병대사령부로부터 긴급한 연락을 받는다. “내일 통일호를 무조건 타라.” 대구까지 나와서 군용열차를 타고 서울로 오라는 지시였다. 그 다음날 서울역 앞. 최 중위를 맞이한 사람들은 사복을 입은 해병 헌병대 요원들이었다. 지프를 타고 서울 용산구 후암동 해병대사령부로 간 최 중위는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인계돼 명동 라이언스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그리고 다음날 어디론가 옮겨져 조사를 받는다. 그곳은 남산. 바로 중앙정보부였다.

“월남에서의 작전을 기억하십니까.” 밀폐된 방에서 단독으로 마주앉은 중정 수사관이 물었다. 그의 손에는 당시 작전계획서와 전투도가 들려 있었다. 수사관은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사실만은 있는 그대로 정확히 알고 싶다”고 말했다.

그날 중앙정보부 조사실에 불려온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수사 도중 화장실에 갔던 최 중위는 뜻밖에 낯익은 얼굴들을 만났다. 중대장 김석현 대위를 포함해 2소대장 이상우 중위, 3소대장 김기동 중위는 물론 선임하사관 등 베트남전 참전 당시의 제1대대 1중대 간부들이 모두 그곳에 있었다. 대부분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일부는 제대해 사복을 입고 있었다.

당시 진해 해병학교 구대장으로 근무하던 이상우 중위(당시 26살)의 증언. “해병대 사령부에서 무조건 올라오라고 했다. 조그마한 군 트럭을 타고 갔는데 알고보니 남산 중앙정보부였다. 장교 대우를 해줬고 어려운 것은 없었다. 욕설도 하지 않고 신사적이었다. 조사를 받고 다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데 중앙정보부 요원이 ‘대통령이 사실을 알아보기 위해 시켰다’면서 앞으로 군생활에 불이익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사 당시 포항 파월특수교육대에 근무했던 김기동 중위(당시 28살)는 수사관이 내밀었던 사진 하나를 잊지 않고 있었다. “베트남 1번 국도에 주검들이 널려 있는 사진이었다. 우리들이 작전했던 곳에서 미군들이 망원렌즈로 찍은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중앙정보부는 무엇을 조사하기 위해 10여명의 장교와 선임하사들을 소환했던 것일까. 1년9개월 전 그들이 베트남의 정글 속에 있던 시절로 돌아가보자.

청룡여단은 1968년 1월30일부터 2월29일까지 여단 규모로 이른바 ‘괴룡 1호작전’을 벌였다. 이 작전은 68년 1월30일 월맹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구정대공세에 맞선 것으로 ‘구정공세 반격작전’으로도 불렸다. 당시 월맹군과 베트콩이 청룡여단의 주둔지 호이안시는 물론 디엔반현 등을 공격하자 전 여단이 나서 베트콩 수색 소탕전을 시작한 것이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1968년 2월12일(음력 1월14일). <파월한국군전사>에 쓰인 당시 작전기록을 보자. “제1중대(장, 김석현 대위)는 08:15에 1번 도로를 정찰하며 북진하고 퐁넛(Phung Nhut) 마을에 진입하였다가 공격방향을 서쪽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1:05에 중대의 선두부대는 목표(11-이곳은 지도상 퐁니촌에 해당한다)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서쪽지역으로부터 30여발의 적 사격을 받아 4.2인치 박격포로 발사지점을 포격하여 제압할 수 있었으나 중대는 부상자 1명이 생겨 후송하였다.”

뱀의 죽음, 그리고 콩볶는 총소리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32년 전의 일. 당시 소대장들은 세부적인 작전상황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략적인 상황은 또렷이 알고 있었다. 1·2소대장에 따르면 이날 작전과정에서 진입한 마을에서 50∼60여명의 아이들과 부녀자, 노인들이 1중대원 누군가에 의해 집단학살을 당한다. 이상우씨는 당시 마을 이름을 “퐁니촌”으로 기억했다.

먼저 당시 1소대장 최영언 중위(58·전 문화방송 스포츠 국장·전 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의 기억. 그에 따르면 퐁니촌은 ‘안전마을’이었다. 게다가 미 해병대 캡 소대와 자매결연까지 맺은 마을이었다(캡 소대란 미군이 정보수집을 위해 조그마한 개별 단위부대로 편성한 소대).

베트남전 당시 민간부락은 보통 ‘자유사격 마을’(free fire zone)과 ‘안전마을’(control fire zone)로 구분됐다고 한다. 전자는 베트콩 거처지역으로 추측되는 곳으로서 민간인이건 베트콩이건 보이기만 하면 무차별 사격해도 좋은 곳이다. 이에 반해 후자는 베트콩과 관계없는 민간인들이 사는 곳으로 월남 정부가 공인한 마을이다. 따라서 만약 사격하려면 상부에 보고해야 하며 포 요청을 해도 지원이 즉각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날 1중대는 1,2,3소대 순으로 1열 종대를 지어 퐁니촌 측면을 통과하고 있었다. 위치상으로 보면 다낭에서 남쪽으로 20여km 떨어진 쿠앙남성 디엔반현 디엔안사 부근. 하노이와 호치민을 잇는 1번 국도에서 서쪽으로 1∼2km 정도 떨어진 독립부락. 1중대는 애초 퐁니촌으로 진입할 계획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을로부터 선두 1소대 병력쪽을 향해 사격이 날아왔다. 순간적으로 모든 소대원들이 수풀 바닥에 엎드렸다. 누군가 한명이 총에 맞아 부상한 듯했다. 최영언 소대장은 중대장 김석현 대위에게 긴급히 무전을 쳤다. 중대장의 응답은 마을을 공격하라는 것이었다. 1소대와 2소대가 방향을 왼쪽으로 틀고 총을 쏘며 마을에 진입했다.

베트콩은 이미 자취를 감춘 듯했다. 소대원들은 마을을 뒤졌다. 젊은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모두 어린이와 부녀자 노인들뿐이었다. 최영언씨는 “그들은 겁먹고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고 떠올렸다. 소대원들은 “라, 라이”(오라)라고 말하면서 집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끌어냈다. 저항은 전혀 없었다. 그는 민간인들을 모두 1번 국도쪽으로 후송을 시키고 마을 끝까지 갔다. 그리고 마을 끝의 밭에서 불길한 예감을 한다. 시야에 큰 뱀이 죽어 있는 광경이 잡힌 것이다. “기분이 굉장히 안 좋다”고 느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들입다 총소리가 나는 것”이 들렸다. “아이들하고 부녀자 모아놓은 것을 누군가가 사살한 거지….” 최영언씨는 “아마 후미 소대의 어느 분대가 쏜 걸로 언뜻 들었다”고 말했다.

2소대장이었던 이상우(57·부산 동아대 체육대학장)씨의 기억도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했다. “1소대와 함께 마을로 진입하니 마을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땅굴에 수류탄을 던지기도 했다. 부상을 입은 이들을 포함해 줄줄이 사람들이 나왔다. 그래서 전부 뒤로 뺐다. 1소대와 2소대가 뒤로 뺀 사람들을 합하면 70∼80명 정도 될 것이다. 중대에 보고하고 앞으로 나가는데 뒤에서 총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는 그날 저녁, 뒤로 후송시킨 사람들을 다 사살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는다.

시체 늘어놓고 통곡하던 사람들

(사진/<파월한국군전사>에 딸린 괴룡1호작전 1중대 전투도. 1번 국도 서쪽에 공격목표 11인 퐁니촌이 보인다)

이상우씨는 그 다음날 아침의 일이 너무 생생해 잊을 수 없다고 했다. 2소대가 1번 국도 정찰을 나가서 목격한 스산한 풍경들 때문이다. 베트남 민간인들이 1번 국도 서쪽, 퐁니촌편 도로변에 가족들의 시신을 가마니 등으로 덮어놓고 통곡하고 있었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어림잡아 40∼50구는 됐다고 한다. 원망스런 눈길로 한국군을 쳐다보고 있었다. 2소대가 지나가자 베트남 민간인들은 울음을 그쳤다. 민간인들 틈에서 언제 총알이 날라올지 몰라 그는 소대원들에게 바짝 경계를 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언뜻언뜻 그들을 보면서 그는 “어제 저녁에 들은대로, 뒤로 뺀 사람들을 모두 쏴 버렸다는 말이 사실이구나”라고 생각했다.

1·2소대장의 증언을 종합하면 후미 소대가 민간인들을 죽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이 나온다. 두 소대장의 일치된 말처럼 “1번 국도 쪽으로 후송시켰다”면, 베트남 민간인들은 3소대 병력과 만났을 것이다. 그러나 3소대장 김기동(59·사업)씨는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개인간의 간격이 5m다. 1개 소대의 길이만 200m가 되는 셈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소대장이 다 알 수는 없다.” 그는 “앞에서 총소리가 들렸고 부락이 불타는 게 보였다”면서 “서너구의 시체와 댓명의 부상자들이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지나쳐 갔던 게 생각날 뿐”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줄 마지막 장교는 중대장이다. 76년 브라질로 이민을 갔다는 김석현씨의 연락처를 어렵사리 수소문해 전화통화에 성공했다. 그는 취재팀의 질문에 일부는 응답하면서도 예민한 사안에 대해선 “답변할 가치가 없다”면서 피해갔다. “누가 죽였습니까.”“산개해서 전투하기 때문에 인디비주얼 액션(개인행동)밖에 안 된다. 난 모르겠다.” 그는 악몽을 떠올리기 싫다고 했다. “우리 아이들은 전쟁을 겪게 하기 싫어 이민을 왔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나이가 먹으니 건망증이 심해졌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은 사실은 시인했다. 비록 언성을 높였지만. “내가 수사관들한테 그랬지. 도대체 명령권자가 누구냐, 국군 통수권자가 누구냐. 대통령 아니냐고 따졌지.”

“조기귀국? 잘 모르겠다”

(사진/69년 11월26일치 <동아일보>1면. 중앙정보부의 조사 이후 발표된 것인지는 확실하지않다)

<파월한국군전사>에 따르면, 김석현 중대장은 67년 11월20일부터 68년 3월2일까지 베트남에서 근무했다. 이 부분이 이상하다. 보통의 베트남전 복무기간이 1년인데 반해 그는 왜 3개월13일밖에 안 했을까. 부상당한 것도 아닌데…. 다시 2소대장 이상우씨의 증언. “김석현 중대장은 그 사건 때문에 1주일쯤 뒤에 조기귀국했다. 나도 베트남에서 조사받았다. 청룡여단 헌병대쪽에서 조사관이 나왔다.”

그러나 김석현씨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조기귀국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이상한 대답을 했다. “잘 모르겠네. 그거야 빠를 수도 있고, 느릴 수도 있고….” 그러나 또다른 증언은 그가 이 사건으로 조기귀국했음을 분명히 증명해준다. 68년 봄 해병1사단 파월특수교육대 교관을 지냈던 김석현씨 선배장교의 말이다. “3월인가, 석현이가 나 있는 곳으로 부임해 왔더라고. 그래서 물었지. 너는 베트남에 간 지도 얼마 안 되는데 왜 벌써 왔냐고. 그랬더니 머리를 긁적긁적 해. 나중에 알아보니 안전마을을 싹쓸이 해 문제가 됐다고 하더라고.”

그의 증언을 부연하면 이렇다. 디엔반현 퐁니촌 사건이 일어난 직후 피해자 가족들의 탄원이 월남 정부에 접수되면서 이 문제는 한-베트남간에 외교문제로 비화된다.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월남 정부쪽의 요구가 들어오자 난처해진 주월한국군사령부는 “귀국 때가 됐다”고 둘러대며 김석현 대위를 조기귀국시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앙정보부는 왜 굳이 1년9개월이 지나서야 이 사건을 조사했을까. 69년 11월 당시는 미국 내에서 밀라이 사건이 크게 보도될 때였다. 지휘관 켈리 중위가 재판을 받고 이에 대한 미국 국민여론이 악화되고 있었다. 젊은이들의 베트남전 반전 데모도 무서운 기세로 확산되고 있었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은 월남 티우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미국의 한 신문에 보도됐다. 이건 그야말로 ‘제2의 밀라이’로 불릴 만했다. 박정희는 대노하여 즉각 진상조사를 지시한 것이다.(미국언론의 보도내용을 확인하는 데는 실패했다)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장교들과 하사관들에게 “중정에서 조사받은 사실을 밖에서 말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실제 이상우씨는 지금까지 부인에게도 이 말을 한 적이 없다. 최영언씨 역시 이 사건을 입 밖에 꺼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결국 진실은 32년 만에 그 일각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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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부산=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


    한겨레21 2000년 05월 04일 제3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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