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표지이야기 [an error occurred while processing this directive]
 

엄청난 일들, 34년만에 말한다
베트남전 참전 중대장 김기태씨의 고백- “모아놓은 주민들 집단사살도 사실”

(사진/수천명의 베트남전 참전군인 원혼이 깃든 서울시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은 김기태씨. 그역시 전쟁기간중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부하들을 잃었다)

누가 죽였습니까.

죽었다는 사람은 천지인데, 죽였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한겨레21>이 8개월째 보도해온 베트남전 한국군 양민학살의 피해자 증언들은 허위이거나 턱없이 부풀려진 것일까요? 아니면 32만명의 베트남전 참전군인 중 진실을 밝힐 참 기백을 지닌 이가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일까요.

<한겨레21>은 여기 한 사람의 참전군인을 소개합니다. 베트남전 당시 해병 중대장으로 1년간 최일선에서 전투를 지휘했던 김기태(65)씨. 그는 자신이 작전과정에서 체험했던 일들을 숨김없이 털어놓았습니다. 베트남전 양민학살의 진실을 추적해온 <한겨레21> 취재팀조차 의심했던 바로 그 사실들- “정말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집단사살했을까.” “설마 무고한 젖먹이나 부녀자들까지 무방비 상태에서 쏘아죽였을까.” 예비역 대령 김기태씨는 담담하게, 그리고 아주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살인교사자이자 집행관이었다.” <한겨레21>은 베트남전 종전25돌을 앞두고, 한 참전군인의 용기있는 증언을 공개합니다. 편집자

폭탄구덩이. 그는 폭탄구덩이를 기억했다.

미군 F4 전폭기가 쓸고 간 흔적. 직경 7∼8m, 깊이 3∼4m의 거대한 웅덩이. 아마도 500파운드짜리 폭탄자국일 거라고 그는 짐작했다. 사람의 고막을 찢어버리고, 파편이 반경 수십m까지 쓸어버렸을 잔인한 흔적. 논 한가운데 놓인 그 폭탄구덩이를 그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이 폭탄구덩이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보슬비 내리던 날, 폭탄구덩이

(사진/용안작전 1단계 전투도. 붉은 원 안의 숫자는 공격목표들)

1966년 11월14일 오후 2시. 베트남의 중부지역인 쿠앙응아이성 선틴현의 서부지역 야산 아래 논바닥. 청룡여단 제2대대 7중대장 김기태(당시 31살) 대위는 그날 그 시각, 바로 그 자리에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놈들을 어떻게 할까요?” 소대장이 그에게 묻고 있었다. 눈앞에는 20∼35살 가량의 청년 29명이 탄약줄에 두손을 묶여 굴비처럼 엮여 있었다. 얼굴엔 공포에 질린 모습이 역력했다. 오전에 산굴 수색과정에서 체포해온 이들이었다.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무기는 찾지 못했다. 오늘은 용안작전 1단계 마지막날. 하노이와 호치민을 잇는 1번 국도를 7∼8km 남겨둔 지점. 작전 철수 뒤 베트남군 포로심문소에 이들을 인계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다.

대대 상황실에서 떨어진 긴급무전. 남쪽 2∼3km 지점에서 6중대가 월맹군 매복조에게 당했으니 빨리 가서 구출하라는 임무였다. 그렇다면 이 29명의 베트남 젊은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이 상황을 단 한마디로 명료하게 표현했다. “처치 곤란!” 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그를 포함해 대원들의 옷은 다 젖어 있었다. 6일 동안 정글을 헤맨 뒤끝이라 군복은 갈가리 찢겨진 상태였다. 까만 얼굴에 악이 받친 눈빛만 번뜩인다. 그는 짤막하게 지시했다. “저리 끌고 가.” 영문을 모르는 베트남 젊은이들은 두 손목이 묶인 채 폭탄구덩이에 던져졌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잇따라 수류탄이 터졌다. 쾅! 쾅! 쾅! 신음소리, 그리고 피비린내…. “야, 확실히 해!” 그의 한마디에 대원들이 주검을 뒤졌다. 탕!탕!탕! 한명씩 확인사살이 가해졌다.

베트남전의 전투현장에서 ‘중대장’은 최고위 장교였다. 그때그때 중요한 상황판단은 전적으로 그에게 맡겨졌다. “제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따라 수십명이 죽고 살고 했습니다. ‘보내! 죽이지 마!’ 하면 사는 것이고 ‘야 새끼들아, 왜 끌고다녀!’ 그러면 한쪽으로 끌고 가 죽여버립니다. 29명도 마찬가지였죠. 지금 생각하면 농부도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데….”

그의 증언은 계속된다. 그는 <파월한국군전사>에 딸린 ‘용안작전’ 전투도를 펼쳐놓고, 그때 체험한 여러 가지 일들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용안작전’이란 66년 11월9일부터 27일까지 청룡여단 2,3,1대대가 번갈아가며 쿠앙응아이성 선틴현에서 벌인 베트콩 탐색 소탕작전을 일컫는다. 김기태씨가 증언한 것은 그 중 자신이 속한 2대대의 용안 제1단계 작전(11월9∼14일)과정에서의 일이다.

‘싹쓸이’가 시작되다

“작전을 시작하기 전 대대장(당시 이명복 중령)과 헬리콥터를 타고 지역을 정찰했습니다. 그렇게 평화스러울 수가 없었어요. 수풀이 우거지고, 삿갓모자를 쓴 농부들이 물소를 몰며 농사를 짓고….” 그뒤 이 지역은 19일 동안 걷잡을 수 없는 참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파월한국군전사>는 이 용안작전의 치열함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여단은 계획한 대로 작전을 개시한 바, 적의 저항이 예상보다 훨씬 강력하였다. 이에 여단장 이봉출 준장은 소재의 적을 발본색원할 때까지 작전기간을 무제한 연장하기로 종래의 결심을 변경하였다.” 여단장의 최초 계획지침은 4일간의 2단계 작전계획이었던 것이다.

폭탄구덩이 집단사살 사건이 있던 날로부터 4일 전. 1966년 11월10일, 작전 2일째(전투도 참조). 7중대는 아침에 공격목표13인 안투엣(3)(An Tuyet3) 마을로 들어갔다. 이곳에선 아무런 저항이 없어 그냥 지나쳤다. 다음은 공격목표14 안투엣(1)(An Tuyet1) 마을. 경미한 저항이 있었다. 그러나 <파월한국군전사>와 <해병전투사 월남편>에는 7중대가 이 마을에서 저격을 받거나 교전을 했다고는 쓰여 있지 않았다. 김기태씨 역시 이 마을에서 공격을 받아 부상을 당하거나 숨진 부하는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 ‘싹쓸이’가 일어난다.

싹쓸이가 뭘까? “불도저로 밀듯이 들어가며 닥치는 대로 집에 불을 지르고, 기어나오는 사람들은 보이는 대로 다 갈겨버리는 겁니다.” 초가집이 30∼40채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앞서가는 2·3소대의 뒤를 이어 중대본부도 마을에 들어섰다. 집은 불타고 있고 길바닥엔 아이들과 여자들, 노인들의 주검이 널브러져 있었다. 머리가 깨지고, 팔이 떨어져 나가고…. 주검이 무더기로 있는 곳도 보였다. 불길을 피해 좁은 길을 걸어갔다. 발끝에 주검들이 툭툭 걸렸다. 그가 무전으로 앞서가는 소대장들에게 고함을 쳤다. “야 이 새끼들아 그만 좀 죽여!”

그는 이 마을에서 대략 몇명이 죽었는지 짐작할 수도 없다고 했다. 다만 주검을 밟고 가야 할 정도로 많은 주검을 목격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그는, 바로 안투엣(1) 마을에서 있었던 일인지는 확실하지는 않다는 전제를 달며 한 여인의 이야기를 꺼냈다(이 기억은 <한겨레21>이 베트남 피해지역을 대조취재하는 데 결정적 증거가 된다. <'바늘자국'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사 참조). 마을 사람들을 한군데 모아놓은 장소에서 겪었던 일이다. “얼굴도 예쁘고, 새까만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20∼25살쯤 돼 보이는 여자였죠. 우리 대원이 ‘남편 어디 갔냐’고 물으니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사관이 ‘쌍년’이라고 욕을 퍼붓고는 ‘베트콩 부인이다’면서 옷을 잡아 북 찢었습니다.”

그 여인에 대한 기억

(사진/용안작전 이틀째 오후 전사한 화기소대장 고 김갑수씨의 묘역을 참배하는 김기태씨. 김갑수씨는 당일 오전 작전과정에서 "사람을 너무 죽이는 것 아니냐"는 말을 남겼다)

그 여인은 하얀 프랑스제 속옷을 입고 있었다. 좋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본 하사관이 “베트콩 간부의 아내가 틀림없다”며 총으로 머리를 내리찍었다. “이마가 죽 찢어졌죠. 다가가보니 피가 마구 흘러내렸습니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위생병을 불러 치료해 주라고 했어요.” 마취제 하나 갖고 있지 않았던 위생병은 옷 꿰매는 바늘과 실로 그냥 상처를 꿰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입을 앙다물고 아프다는 비명소리 하나 지르지 않았다. “그걸 보면서 ‘얼마나 악종이고 적개심이 있으면 저런 상황에서 ‘아’ 소리 하나 안 지르나’ 하고 느꼈어요. 그 광경이 너무 인상적이라 34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파월한국군전사>나 <해병전투사 월남편>에는 7중대가 이날 공격목표13과 14를 공격하고 5중대의 공격을 돕는 차단작전을 한 다음, 오후에 빈록(2)(Vinh Loc2) 마을쪽으로 옮겨가 치열한 야간전투를 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김씨는 차단작전을 하기 전에 서쪽에 있는 마을 하나를 더 공격했을 거라며 기억을 더듬었다.

마을 바로 앞에 한곳으로 모여 있는 주민들, 그리고 그 옆에 우거진 사탕수수밭. 이전 마을에서 “그만 좀 죽이라”고 고함친 탓에 앞서가던 2소대와 3소대원들이 이번에는 주민들을 모아 앉혀놓은 것이다. 40∼50명쯤 됐을까. 그 주위를 부하들이 빙 둘러싸고 있었다. 이름을 물으며 아이들한테 사탕을 주거나 담배를 건네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대부분 아이들과 여자들, 노인들이었다.

“야, 그냥 보내!” 김기태 중대장은 중대본부를 뒤따라오던 화기소대에 주민들을 살려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는 소대들을 지휘하며 전진했다. 몇 걸음이나 옮겼을까. 탕!탕!탕! 드르르륵! 드르르륵! 뒤에서 총성이 요란했다. “야, 새끼들아 뭐야!” 고개를 돌리며 고함쳤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계속 이어지는 수류탄 굉음. 쾅! 쾅! 쾅! “자식들아, 뭐야?” 대답은 같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섞여나왔다. 이미 엎어진 물. “야, 새끼들, 확실히 해!” 그가 소리쳤다. 사탕수수밭으로 달아나는 사람들도 얼핏 보였다. 중대원들은 “라 라이!”(이리와!) 하면서 달아나는 이들을 쫓아가 총을 쏘았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냥 갈 수 없습니다. 누군가 살아 남아서 증언하게 되면 골치아픕니다. 중대장으로서는 전쟁터에서 양민학살을 하는 것이 되니까, ‘확실히 하라’고 하지요. 확인사살을 하라는 뜻입니다. 이후에 그 일에 대한 증언이나 보고가 없어 모두 죽은 걸로 압니다.”

전쟁은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는가

이 증언은 중요하다. 지금까지 <한겨레21>이 만난 많은 참전군인들은 마을 주민을 ‘모아놓고’ 죽인 일은 없다고 부인해왔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저격이 날아오면 무차별 포격과 총격을 가했다”거나 “마을에서 작전중에 뛰어 달아나는 사람을 쐈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와중에 민간인도 희생됐을 것이라는 모호한 추측이었다. 그러나 김기태씨는 모아놓은 마을 주민들을 집단사살한 것이 사실임을 시인했다. “마을에 들어가 수색할 때 주민들을 한군데 모아놓습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중대장이 어떤 지시를 하느냐에 죽고 살고 합니다. ‘야, 귀찮게, 왜 모아놨어!’ 그러면 부하들이 한쪽으로 끌고 가 갈겨버리지요.” 특히 아군에 부상자나 전사자가 생겼을 때 그랬다고 했다. 꼭 “죽이라”고 명령하는 게 아니라 “귀찮다”는 중대장의 말 한마디, 얼굴 표정 하나로 부하들이 끌고 가 쏘아죽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존자가 혹시 있을지 몰라 확인사살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디, 디’(가라) 하면서 살려 보내준 경우가 더 많았지만.

베트남전 전투현장에 갓 투입된 신병들은, 고참들이 베트콩 용의자를 잡아와 쏘라고 하면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병도 서서히 전쟁에 익숙해진다. “대여섯살 꼬마들한테 시레이션을 까서 사탕이나 담배를 주다가 일어서서 가슴에 대고 ‘탕’ 쏴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발로 툭 걷어차버립니다. 왜 죽였냐고 물어봤죠. ‘아, 베트콩 자식인데 나중에 애비 애미 원수갚겠다고 덤벼들지도 모르잖아요’ 그럽니다. 사람 죽여보고 묻어본 사람이라면 사람 죽이는 걸 예사로 아는 법입니다.”

전쟁에서 인간의 목숨은 얼마만한 가치를 가지는 것일까. 전쟁을 치르지 않은 사람은 전쟁을 모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전쟁이라는 상황이 모든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일까. 이제는 ‘과거’이기에 역사에 조용히 묻어버려야 하는 것일까.



  • 30여명 추적 끝에 첫 증언
  • '바늘자국'을 기억하고 있었다
  • 중대장도 모르는 또다른 '싹쓸이'
  • 여전사의 순애보, 전설이 되어…
  • 김기태 예비역 대령 인터뷰
  • 김기태의 전쟁인생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

    한겨레21 2000년 04월 27일 제305호

  • .


    ●지난호 ●한겨레21홈 ●씨네21 ●편집자에게 ●구독신청


    Copyright 1995-1998 한겨레신문사
    webmast@new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