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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음악, 그 깃발이 싫다”
히노마루·기미가요에 등돌리는 일본 초·중·고 졸업식장의 진풍경

요즘 일본 내 초·중·고등학교에서는 졸업식이 한창이다. 그런데 예전과 달라진 졸업식 풍경이 있다. 가슴에 ‘노랑 리본’을 단 학생과 학부모들이 많이 눈에 띤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학교 당국이 졸업식장에 히노마루(일장기)를 내걸고, 기미가요 부르기를 강요하자 항의의 표시로 이렇게 한 것이다.

도쿄의 도야마고등학교에서는 졸업식이 시작되면서 기미가요 반주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자, 절반가량의 학생과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자리에 그냥 앉아버렸다. 심지어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떠나는 학생들도 있었다. 지난해 8월 국회에서 ‘국기·국가법’이 통과돼 기미가요와 히노마루가 법적으로 일본의 상징물로 인정된 뒤 처음 치러진 졸업식에서 벌어진 진풍경들이다.

신·구세대가 다른 ‘반대의 이유’

(사진/"학생들에게 양심의 자유를 달라." 시민단체들이 기미가요 강제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기미가요는 일본 천황의 통치가 천년, 만년 계속되리라는 노래말을 품고 있는 노래이고, 히노마루는 일본 국민은 물론 상당수의 아시아인들이 그 깃발 아래에서 고통받으며 죽어간 전쟁의 상징물이다. 일본 정부는 그간 나라 안팎의 거센 반발 때문에 기미가요와 히노마루 법제화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물밑으로 끊임없이 합법화 작업을 밀어붙여왔다. 우선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기미가요를 슬그머니 넣더니, 히노마루가 일본의 국기임을 가르치게 했다. 이런 교육을 받은 세대가 성인이 되어 거부감이 누그러지자, 어느 날 갑자기 문부성, 교육위원회는 기미가요·히노마루를 슬그머니 강제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서 99년 2월에는 교육위원회의 강압과 학생들의 반발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하던 히로시마의 한 고등학교 교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정부·여당은 내친김에 ‘국기·국가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키기에 이르렀다. 당시 정부는 학생들에게 강제하지 않고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단서조항을 달았지만 이는 실제로 지켜지지 않았다.

올 졸업식에서도 교육위원회는 각 학교 당국에 공문을 보냈다. 졸업식장에 히노마루를 게양하고, 식순에 기미가요 제창을 넣도록 했다. 이에 따르지 않는 학교에는 불이익을 주겠다는 위협도 넌지시 전달했다. 이 위협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졸업식 예행연습에서 기미가요 제창을 저지한 교사가 주의조처를 받거나, 초등학교에서 기미가요를 가르치기를 거부한 음악교사가 하루아침에 해직되기도 했다. “기미가요·히노마루가 싫으면 일본을 떠나라”는 식이다. 설문조사를 토대로 “히노마루·기미가요가 없는, 우리를 위한 졸업식을 하고 싶습니다”라는 내용으로 졸업생들이 공들여 만든 청원서는 이런 위협 앞에서 쉽게 무시됐다.

시민단체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학부모들은 졸업식장에서의 침묵과 같은 소극적 방법뿐만 아니라, 집회를 열고 항의성명을 발표하는 등의 적극적인 방법도 동원했다. 지난 2월27일 열린 요코하마의 집회는 연설 도중 우익의 난동으로 집회가 무산되기도 했다. 몇개의 시민단체들이 모여 만든 ‘반히노마루·기미가요 네트워크’(www.jca.apc.org)라는 인터넷사이트도 운용하고 있다. 이 사이트는 한글과 중국어로도 볼 수 있어, 일본의 식민지·반식민지 경험을 가진 이웃나라 국민들의 동참도 가능하다.

히노마루·기미가요 반대운동을 벌이는 입장은 세대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다. 일찍이 전쟁을 겪은 세대들은 기본적으로 국기·국가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 하지만 침략과 군국주의의 상징물인 히노마루·기미가요를 결코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견해다. 따라서 이들은 새로운 국기 그리기 대회, 새로운 국가 공모 등의 행사를 벌이면서 전 국민이 합의할 수 있는 국기·국가를 채택하자고 주장한다. 반면 왜곡된 역사 교과서로 배워왔던 신세대들은 히노마루·기미가요의 부끄러운 역사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다만 국가권력이 개인들을 획일적으로 하나의 깃발 아래 모으고, 하나의 노래를 부르게 하는 데 저항감을 느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히노마루·기미가요 반대’가 아니라, ‘히노마루·기미가요 강제 반대’라고 말한다. 국가권력이 국민 각 개인에게 애국심을 강요하는 것 자체가 억압이며 폭력이라는 것이다.

“교원에겐 엄격하게, 학생에겐 부드럽게”

학교당국은 학생들과 학부모, 시민단체의 거센 반대와 교육위원회의 강력한 지시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국민적 저항에 부딪힌 문부성과 교육위원회가 ‘교원에게는 엄격하게, 학생에게는 부드럽게’라는 방침을 내려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기·국가법’ 제정 이후 학교 당국의 태도는 더욱 강경해져 히노마루를 항시 게양하는 학교도 상당수에 이른다. 국민들에게 강제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약속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난 것이다.

도쿄=윤대석 통신원

yds70@yahoo.co.kr

한겨레21 2000년 04월 06일 제3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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