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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선언 느낌이 좋다
발표 전 북한과 사전 교감… 김 대통령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우호적 평가도 큰 힘

(사진/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베를린 선언을 발표하는 김대중 대통령. 북한이 김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어느때보다 높게 점쳐지고 있다)

남북 당국관계가 과연 긴 겨울잠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3월10일 “우리 정부는 북한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돼있다”며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와 항구적인 평화 및 남북간 화해·협력을 위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다. 김 대통령은 이 선언에서 “지금까지 남북한간에 정경분리 원칙에 의한 민간경협이 이뤄지고 있었으나 이제는 정부 당국간의 협력이 필요한 때”라며 북한쪽에 △정부당국간 협력 △화해와 협력제안 적극 호응 △이산가족 문제 해결 △특사교환제의 수락 등 4개항을 촉구했다. 그는 정부차원의 협력사업으로 도로·항만·철도·전력·통신 등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투자보장협정과 이중과세방지협정 등 투자환경 조성, 식량난 해결을 위한 비료지원, 농기구 개량, 관개시설 개선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공은 이제 북쪽으로 넘어간 셈이다.

시행착오 되풀이 말자 확인 또 확인

(사진/지난 3월6일 인천항 제1부두에서 열린 북한동포에게 계란2천만개 보내기 출정식. 이번 베를린 선언이 있기까지 기업과 북한지원단체 등 민간의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면 북한은 이 제의에 응할 것인가. 대다수 전문가들의 견해는 북한이 이 제안을 상당 부분 수용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는 쪽으로 모아진다. 최근 북한의 핵심 고위인사를 만나고 돌아온 남쪽 대기업이나 정부 관계자들의 말을 모아보면, 북한이 과거처럼 김 대통령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할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는 것이다. 특히 대북제의가 나오기 전에 남북한이 어느 정도 교감을 주고받은 것 같다는 관측도 더해진다.

남북한 당국은 현 정부 출범 뒤 이미 2차례의 차관급 회담을 열었으나 번번이 아무런 성과를 낳지 못한채 불신의 앙금만을 남겼다. 하지만 양쪽 당국은 최근의 물밑 접촉에서는 또다른 시행착오를 겪지 않기 위해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등 몇 차례의 조율과정을 거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한 핵심관계자는 “지금 상세한 내용을 밝힐 수는 없으나 우리는 북한에 체제안전과 경제적 이익, 농업지원 등을 보장하는 대신, 북한이 군사도발을 하지 않고 미사일·핵 문제 등을 일으키지 않을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안다”며 “북한쪽도 원칙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을 알려온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특히 정부는 가시적인 신뢰의 표시로 북한에 올해안에 적게는 10만t에서 많게는 60만t의 비료를 제공하는 방안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남북 당국간에 남은 문제는 회담시기와 이산가족 문제 등 몇 가지 민감한 의제 조율정도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정황 탓인지 통일부 장관의 말 속에도 자신감이 듬뿍 묻어난다. 박재규 통일부 장관은 남북간 물밑 접촉설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으나 여러 경로를 통해 북한의 의사를 전달받았으며 우리의 의사도 북쪽에 전달하고 있다”면서 “북한이 전과는 달리 이번 제의를 거부하지 못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박 장관은 다만 “북한은 이번 제의에 빨리 응답하지 않고 심사숙고한 뒤 수정해서 답변을 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과거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차관급 회담의 경우 북한이 실리만 추구하려는 모습을 취했지만, 이번에는 많은 지원이 제의에 포함된 만큼 과거의 사례와는 다를 것”이라고 강조해 이산가족 문제에서도 북한이 어느 정도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왔음을 강하게 내비쳤다.

북한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정부 태도 바꿔

(사진/김대중 대통령의 대북제의를 전달한 박재규 통일부 장관)

이번 대북제의의 형식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 많다. 통일부 관계자는 “정부가 왜 이례적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제의를 박재규 통일부 장관 명의의 편지형식으로, 그것도 북한의 김용순 아태평화위 위원장에게 직접 전달했는지를 눈여겨봐야 할 것”이라면서 “남북관계를 실무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이 두 사람이 각각 특사의 중책을 떠맡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정부가 김 대통령의 연설보다 10시간이나 앞선 시점에 대북제의를 북한에 미리 귀띔해준 것이나, 북한이 이를 미리 알고 있은 듯 선뜻 편지를 수령한 것도 이런 전망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김 대통령은 굳이 왜 총선을 앞둔 미묘한 시점에 이런 제의를 한 것일까? 사실 정부는 그동안 여러 민간채널을 통해 북쪽 지도부의 전향적 자세를 감지하고도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신중한 태도를 취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박재규 통일부 장관은 지난 2월 초 올해 통일부 주요업무계획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성급한 당국대화 추진으로 4월 총선에서 쓸데없는 오해를 받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이는 대북카드가 과거 정권에서는 선거에서 유리하게 작용해왔으나, 이번 총선에서는 되레 불리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북한이 최근 총선을 염두에 둔 제의를 은밀히 여러 차례 해왔으나 정부는 그때마다 응하지 않았다고 박 장관은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런 정부가 갑자기 자세를 바꿔 큰 보따리를 풀어놓은 것은 북한의 예상치 못한 반응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책임있는 당국자가 남쪽 정부의 기대 이상으로 진솔한 반응을 보여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박재규 장관은 11일 “북한이 지난달 중순부터 우리에게 더 많은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고 말해 이런 정황을 뒷받침했다. 정부가 보이고 있는 자신감도 북한의 이런 태도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촉박한 농사일정도 회담제의를 앞당긴 한 요인으로 분석된다. 북한이 당장 남쪽으로부터 도움을 얻고 싶어하는 비료 등은 4월 집중 파종기를 넘기면 효용이 떨어진다. 총선일인 4월13일을 넘겨서 대북제의를 주고받고, 아무리 서둘러 특사교환이나 당국간 회담을 연다 해도 비료를 제때에 뿌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당국간의 본격적 접촉은 총선 이후에 하더라도 미리 제의를 해놓고 후속조처를 취해놓을 필요성을 느낀 듯하다. 이에 따라 정부는 때마침 김 대통령이 50년 분단의 역사를 경험한 통일 독일의 수도를 방문하는 날을 대북제의 발표의 최적시기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기업과 대북지원단체 등 가동해 북한 의중 탐색

(사진/아태평화위 위원장 김용순)

그렇다면 서로 등을 돌리고 있던 남북 당국을 마주보게 하도록 측면지원한 사람은 누구일까. 이번에는 정부쪽 채널이 가동된 흔적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는 게 북한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정부는 지난해 후반기에도 차관급 회담을 재개하기 위해 몇 차례 신호를 보냈으나 북쪽은 완강히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구나 지금은 총선을 앞둔 상황이다. 남북한 정부 인사간의 비공식 접촉은 더 큰 오해와 파장을 불러올 수도 있다. 그렇다고 정부가 완전히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지난 3월6일 이례적으로 <노동신문> 논평을 통해 “국가정보원이 또다시 북남대화를 주관하려하고 있는데 이는 북남대화에 대한 우롱”이라고 갑자기 목청을 높였다. “북남대화가 민족의 단합을 도모하려면… 정보원의 개입부터 일절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으름장을 놔 정부채널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뜬금없이 나온 북쪽의 이 발언은 역설적으로 남북간 비공개 접촉이 이뤄지고 있음을 강하게 내비친 것이었다.

진짜 깜짝쇼는 총선 뒤에 열린다

(사진/압록강변에서 바라본 북한의 농촌풍경. 곧 농사철이 다가오면서 촉박해질 북한의 농사일정도 회담제의를 앞당긴 한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그간 남북 당국을 이어온 핵심채널은 남북경협을 추진하고 있는 한 대기업 관계자다. 물론 정부는 현대를 비롯한 대기업과 대북지원단체 등 여러 채널을 동시에 가동해 북한의 의중을 탐색해 왔다고 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북한 당국이 대화재개에 응할 가능성이 있음을 확신한 것은 ㄱ그룹의 ㅂ아무개 사장이 전해온 북한 고위층의 구두 메시지였다는 게 중론이다. 김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에 북한에 대한 인프라건설 지원 등이 유달리 강조된 대목도 그의 조언이 적지 않게 작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최근까지도 김용순 아태평화위 위원장을 비롯한 북쪽 고위인사를 수시로 접촉할 정도로 북한 지도부의 신뢰를 받고 있으면서, 남쪽 당국으로부터도 실력을 인정받아 왔다.

그는 특히 북한쪽 고위인사를 만날 적마다 북-미, 북-일 관계를 통한 경제건설의 한계를 조목조목 설명하며, 궁극적으로 북한을 도울 나라는 같은 민족인 남한밖에 없다는 점을 줄기차게 설득해왔다고 한다. 그는 특히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경협사업도 결국에는 도로, 항만건설 등 정부차원의 인프라건설 지원없이는 한계가 있음을 설명하면서 당국간 회담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실 북한 서해안에 개발을 추진중인 2천만평 규모의 현대공단도 남쪽의 입주기업이 850개사나 되는 만큼 인프라개발 없이는 성사가 불투명한 실정이다. 현대아산 관계자는 “현재의 북한 항만과 전기 사정으로는 공단 개발이 불가능하다”면서 “당국간 합의아래 남쪽 기업들이 북한의 사회간접자본 확충 사업에 뛰어드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당국이 남쪽 당국에 대한 싸늘한 태도를 누그러뜨리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무엇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김대중 대통령의 우호적 평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대통령은 지난 2월9일 일본 <TBS> TV와의 회견에서 “지도자로서 판단력과 식견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김 위원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사실 한국의 역대 대통령이 북한 지도자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리기는 처음이며, 특히 색깔시비에 시달려온 김 대통령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 북한은 모처럼 김 대통령에게 후한 점수를 줬다는 게 북한내부 소식에 밝은 정보통들의 얘기다. 실제 북한은 김 대통령의 발언 이후 경협추진기업이나 지원단체들을 통해 정부차원의 대북지원 요청을 넌지시 건네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는 또한 북한과 수교협상을 진행중인 다른나라를 통해 북한쪽에 ‘남북대화의 필요성’을 줄기차게 설득해왔다. 북한은 그동안 한국 정부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고집했으나 최근 미국, 일본은 물론 지난 1월 수교한 이탈리아, 현재 수교협상중인 캐나다,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등과의 대화를 통해 ‘남북관계 진전’의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 같다는 게 남쪽 정부 당국자들의 설명이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남북 당국간 접촉이 어떤 형식으로든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정부의 일부 고위관계자들은 “총선이 끝나면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까지 얘기할 정도다.

북-미, 북-일 수교협상 결과에 영향받을 수도

물론 이런 낙관론은 성급하다는 분석도 없지 않다.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바라보는 북쪽의 시각이 여전히 곱지 않은데다, 시기적으로 북한이 남쪽 제의에 적극 나설 형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미국에서 진행중인 준비회담을 거쳐 다음달이면 미국, 일본과 본격적으로 관계개선 및 수교협상에 주력해야 할 북한으로서는 그 결과를 지켜본 뒤에 대남정책의 큰 줄기를 결정할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다. 또 남북 사이에 엄존하는 기본적인 문제들, 즉 비전향장기수 송환, 국가보안법 개정문제 등을 뛰어넘어 관계진전이 바로 이뤄질 수 있겠느냐는 비관론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어쨌든 이런 복잡미묘한 상황 속에서 남북한 당국간의 관계가 어떤 그림을 그려나갈지 주목된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한겨레21 2000년 03월 23일 제3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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