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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

관념의 유희에 머물 것인가
현실에서의 탈주를 꿈꾸는 급진적 수사… 거대 산업사회에 대한 실천적 전망 부재

(사진/이인화(가운데)는 포스트모던을 빙자해 박정희(맨위)위 헌정파괴행위를 찬양한다.니체의 사상도 미적 순응주의 이데올로기 탈바꿈한다(맨 아래))

20세기의 종말론은 신학적 종말론이 아니라 철학적 종말론인가? 지난 10년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물결이 우리 지성계를 휩쓸고 지나갔다. 자기가 목청 높여 비난하는 “근대”와 별 차이 없이 근대적 방식으로 수용된 이 흐름은 그에 못지 않은 폭력성을 가지고 “계몽”, “해방”, “진리”, “이성”과 “보편성”을 폭력으로 매도했다. “대서사”를 해체한 그 ‘슈퍼 대서사’가 지난 10년간 잡지의 지면을 휩쓸고 지나갔지만, 정작 그 방대한 논의가 우리 사회를 설명하는 데에 어떤 기여를 했던가. “근대”가 무너진 자리에 그 ‘공백’을 ‘공백’으로 메우려고 등장한 이 ‘공백의 사상’. 그것이 남긴 것은 무엇인가. 세련된 취향? 사상의 다원성? 관계의 비(非)폭력성? 아니다. 졸지에 심오한 형이상학의 수준으로 격상된 이론적, 실천적 보수주의뿐이다. 이것이 일체의 사회적 행동주의에 대한 냉소라는 형태로 90년대 우리 사회의 멘털리티를 지배해왔고, 이제 이 냉소주의에 냉소를 보낼 때가 왔다.

우리 사회에 파고든 네개의 포스트모던

포스트모더니즘은 원래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최초로 정치적 자기 주장을 하던 시기에 그 이념적 표현인 사회주의에 대한 대항이념으로 소개되었다. 그러던 것이 사회주의의 몰락 뒤엔 역설적으로 유토피아를 잃은 좌파들이 현실에서 “탈주”하는 도피처가 되었다. 그뒤에는 죽은 독재자를 찬양하는 극우파로부터, 거대한 폭력은 너그러이 용서해줄 아량이 있으나 한줌의 반폭력은 죽어도 못 참는 자칭 ‘댄디’들의 엄살을 거쳐, 한때 권력을 비판하느라 다른 권력을 찬양했던 과거가 부끄러워 권력 그 자체를 부정하기로 결심한 극좌파까지 모두 다 포스트모더니스트를 참칭하고 나섰다. 한마디로 포스트모던은 지식인 사회가 정치적 관점의 차이를 넘어 오랜만에 함께 부른 가슴 뭉클한 민족 대화합의 서사시였다.

우리의 포스트모던은 크게 네 방향으로 수용되었다. 첫째는 포스트모던의 근대 비판을 민주주의의 폭력적 전복으로 해석하는 극우적 수용방식이다. 가령 포스트모던을 빙자하여 박정희를 낭만주의적 영웅=천재=악마로 둔갑시키면서 그의 헌정 파괴 행위를 찬양하는 이인화를 생각해보라. 둘째는 근대를 ‘탈’하여 전근대로 되돌아가는 복고주의적 해석이다. 포스트모던의 이름으로 낡은 유교적 전통의 복고를 주장하는 함재봉의 논리가 여기에 속한다. 셋째는 포스트모던의 근대 비판에서 곧바로 선불교와 노자를 찬양하는 데로 날아가는 동양주의적 해석이다. 넷째는 ‘근대’라는 희생양에 모든 사회악의 책임을 돌리며 아무 대안없는 거기에 급진적 비판을 가하는 니체주의자들의 극좌적 수용방식이다.

극우적, 보수적, 동양주의적 해석은 별로 언급할 가치가 없고 무정부주의적 해석에 대해서만 코멘트하자. 좌파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자본주의 틀 내에서 가능한 개혁에 간단히 ‘근대적’이라는 딱지를 붙여 매도한다. 그리고 거기서 “탈주”하여 요란한 급진적 수사를 늘어놓으며 문화라는 미시영역으로 도피하고 싶어한다. 이 횡단 운동의 결과 정치는 탈정치화하고, 문화담론은 급진적 정치적 개념들의 옷을 입고 탈문화화한다. 우리가 지금 사회과학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학자가 예술가로 진화(?)하는 게 진보로 여겨지는 이 고약한 분위기 때문이다. 이렇게 니체조차 졸지에 미적 순응주의 이데올로기로 만드는 것. 거기서 나는 외려 낡은 하비투스(습속)의 집요함을 본다. 이는 물론 니체사상의 배반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탈근대냐, 전근대냐

(사진/영어의 제국? 개별문화의 다양성을 하나의 언어로 획일화하는 영어교육이 우리사회에서도 극성을 부리고 있다)

철학적 포스트모던은 논리적으로 매우 문제가 많은 사상이다. 가령 이들의 이성 비판은 17세기의 바로크적 합리성에나 무리없이 적용될 수 있다. 게다가 이들이 기초로 삼은 언어철학적 전제에도 의심스런 부분이 많다. 동일성을 차이로, 존재를 생성으로, 개념을 은유로 바꾸어놓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포스트모던의 테제들은 철학적으로는 거의 자살 테제에 가깝기에 거기에 담긴 직관적 통찰을 끄집어내려면 정교한 논리적 검토와 수많은 논리적 유보가 요구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제까지 포스트모던의 ‘비판적’ 수용의 예를 단 하나도 보지 못했다. 전면적 수용. 종교적 텍스트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는 우리 지성계의 텍스트 수용이 전근대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최근 앨런 소칼과 장 브리크몽의 <지적 사기>라는 책이 나왔다. 그러자 다시 분위기가 바뀌어 이제 철학적 포스트모던은 “지적 사기”로 간주되는 분위기다. 물론 일각에서는 프랑스 철학자들이 과학적 개념을 멋대로 오용하고 있다는 소칼의 주장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제가 팔아먹은 상품을 헐뜯는 자에게 보내는 지식 소매상의 히스테리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 논쟁의 바탕에는 물론 미국과 프랑스라는 두 사회, 철학자와 물리학자라는 두 부류의 사람들 사이의 멘털리티의 차이가 놓여 있을 게다. 하지만 그 통약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소칼의 책에는 분명히 논쟁으로 해결해야 할 논점이 존재한다. 소칼의 책을 반박하든 아니면 수용하든 어쨌든 논쟁을 통해 지난 10년간 지성계를 주름잡았던 이 사상적 흐름에 뭔가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철학적 포스트모던은 분명히 생산적인 포텐셜을 갖고 있다. 바로 그 포텐셜을 살려야 한다. 즉 우리의 포스트모던은 무차별한 교환원리의 폭력으로부터 내 안의 자연(=신체)을 수호해야 한다. 또 자연을 정복의 대상, 무한히 착취 가능한 이윤의 원천으로 보는 자본주의적 폭력에서 자연의 위엄을 구원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기술 발전에 떠넘기는 보수적 기능주의로부터 새로운 사회적 행동을 기획해야 한다. 나아가 모든 것을 교환가치로 환원하는 근대의 과격한 반전통주의의 폭력으로부터 지킬 만한 전통을 보존해야 한다. 나아가 개별 문화의 다양성을 하나의 언어로 획일화하려 드는 자본의 제국(=영어의 제국)의 모노포니를 무너뜨리고 여러 민족문화의 다양한 목소리가 함께 어울어지는 폴리포니를 연주해야 한다. 한마디로 우리의 포스트모던은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미학적 비판이 되어야 한다.

근대와 탈근대의 변증법을 찾아서…

(사진/포스트모더니즘은 거대 산업사회에서의 노동에 기초한 공정한 분배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분배구조는 거의 착취 수준에 가깝다. 그래서 사회정의의 요구를 언어적으로 분절화하여 정치적으로 제기하는 ‘근대적 기획’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우리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문제는 근대의 기획과 탈근대의 기획을 적대적으로 대립시키고, 전자를 후자로 대체한다는 데에 있다. 우리의 포스트모던 논의의 불모성은 여기서 비롯된다. 물론 환경운동, 생명운동, 공동체운동, 대안교육운동, 소수자운동 등 근대적 아르스 비벤디(생활방식)를 벗어나는 탈근대적 기획은 매우 귀중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거대 산업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이 될 수는 없다. 가령 거대 산업사회 속에서 박노해처럼 한달에 50만원 갖고 생존하기란 불가능하고, 대안교육으로 수백만의 학생에게 교육 서비스를 제공할 수는 없으며, 탈근대의 미학을 구현한 건축으로 전세금을 마련하느라 고생하는 세입자들에게 살 집을 마련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근대의 기획을 대체할 수 없는 규모의 미시적 기획이지만 탈근대의 대안운동은 그 존재 자체로서 자본주의적 아르스 비벤디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을 수행하면서 우리에게 거대 산업사회를 변화시키는 데에 필요한 영감의 원천이 돼준다. 따라서 문제는 근대와 탈근대의 변증법이다. 말하자면 공정한 분배에 기초한 사회정의의 원리에 입각한 거대산업사회에, 다양한 탈자본주의적인 아르스 비벤디들이 평화적으로 접속한 형태가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회의 모습이 돼야 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우리의 포스트모던 논의는 이런 실천적 전망 속에서 구체적으로 자리잡을 때 비로소 공허한 관념의 유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진중권/ 자유기고가

kyoko@channeli.net

한겨레21 2000년 03월 02일 제2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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