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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성 소리만 듣고도 보복”
최초공개하는 미국 민간인 보고서, 다이앤 & 마이클 존스의 ‘한국군이라 불린 동맹군1’ <보고서 전문>

(사진/"우리는 전쟁이 싫습니다." "베트남 민중을 사랑합니다." "대통령은 진실규명에 나서십시오." 기온이 뚝 떨어진 지난 1월21일 오후 4시.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앳된 표정의 중고생 30여명이 꽁꽁 언 손을 녹이며 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국제민주연대가 주최한 2박3일의 '청소년 평화인권마당'을 마친 학생들이 '베트남 양민학살 사죄' 거리 캠페인에 나선 것이다. 평화인권마당 기간중 '베트남 양민학살'에 대한 강의를 듣기도 한 학생들은 1시간 동안 이곳을 지나가는 시민에게 성명서를 나눠주고 '진실규명촉구' 서명을 받았다)

지난주에 예고했던 ‘베트남전 한국군 양민학살’ 미국 민간인 보고서를 싣는다.

이 보고서는 다이앤 존스와 마이클 존스가 72년 5∼8월 사이 동남아시아 평화봉사단원으로 일하면서 채록한 것으로 75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퀘이커 봉사단 자료에 실린 것이다. 미국에 있는 독자 최종수씨가 입수한 것으로 국내에는 최초로 공개되는 것이다. 분량이 많아 몇차례에 나누어 싣는다.

편집자

“우리는 초기부터 모든 군인에게 ‘백명의 적군을 놓친다 하더라도 단 한명의 민간인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지시키면서 이것을 준수해야 할 행동수칙으로 설정해 왔다. 이는 베트남에 주둔하는 모든 한국군에 엄격하게 적용돼 왔으며 사실상 최근 우리는 목숨을 걸고 소중히 지켜오고 있다.”(이세호 중장, 주월 한국군 사령관)

(사진/100만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 인터넷기업 '골드뱅크'(대표 김진호)가 '베트남전 한국군 양민학살 피해자가족 돕기 운동'에 나섰다. 골드뱅크는 최근 자사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새 천년에 부르는 진혼의 노래-베트남 한국군 양민학살 피해자가족 돕기 운동' 사이트를 마련했다. 골드뱅크는 이 사이트에서 "따이한이 베트남에 남긴 흔적은 너무나도 참혹했다"며 이제는 가해의 역사에 진정한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골드뱅크는 베트남 피해자가족을 돕기 위한 '사이버 머니'도 모금중이다. 1월24일 오후 4시 현재 36만9753원이 모였다.www.goldbank.co.kr)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총을 쐈다"

“한국군이 단 한방의 총성을 듣기만 해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마을의 주민 90명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남베트남 빈두옹사의 한 자치위원)

안하이(우리는 정보를 제공해준 모든 이들의 안전을 위해 그들의 실명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1번 국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선록사에 살았다. 쿠앙응아이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의 집 가까이에 주둔했던 유일한 동맹군은 누이쫀(쫀산)이라는 작은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100명의 남베트남 정부군(ARVN)과 약간명의 한국군 고문관들이었다. 안하이는 자기 마을은 민족해방전선(NLF)에 세금을 내고 있었지만 그들의 병력이란 몇명의 지역 게릴라로 출몰하는 것으로 한정돼 있었다고 말했다. 안하이는 우리한테 한국 해병부대인 청룡부대가 그의 마을에 들어와 벌인 작전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1966년 11월9일, 내가 15살이었을 때다. 난 우리 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디엔니엔촌에 살고 있는 친구 집에 가 있었다. 우리는 많은 인원의 군대가 행진해오고 있는 것을 봤다. 우리는 그들이 남베트남 군대인 줄 알고 계속 놀았다. 군대가 가까이 오자 아직 논으로 일을 나가지 않았던 남자들은 숨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별로 무서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남베트남 군인들이나 미국군들은 우리 마을에 왔었지만 사람들을 해치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한국군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 숨으려고 했다 하더라도 이미 너무 늦은 때였다.”

“군인들은 마을에 들어와 동네사람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베트남 말이란 겨우 ‘디, 디’(가, 가)라는 말이 전부였다. 그들은 통역관을 데리고 있지 않았다. 군인들은 나이든 남자들과 소년들을 군중 가운데 끌어내 한쪽으로 줄을 서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명령했다. 군인들은 줄 제일 끝에 있던 13살짜리 남자아이를 사람들 앞에 세워놓고 한국말로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물론 그 아이나 우리 가운데 아무도 그들이 하는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군인들은 아이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더니 총을 쐈다. 그리고 구덩이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두 번째 남자아이를 지명하고는 질문을 하기도 전에 심하게 구타했다. ‘너 영어할 줄 알아?’ 그때 내가 입을 열었다. 난 학교에서 영어를 조금 배웠다. 베트남-한국어사전의 도움과 짧은 영어실력으로 그들이 내게 물었던 질문에 대답했다. 내 이름과 나이 그리고 마을에 대해 대답했지만 베트콩 작전지도부의 위치를 물었을 때 모른다고 하니 총구를 내 목구멍에다 겨누었다.”

“바로 그때, 누이쫀에 있던 대장이 한국군 고문관과 함께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난 죽었을 것이다. 그들은 함께 디엔니엔에 있는 사람들은 베트콩이 아니고 그곳에 있는 남베트남군의 통제를 받고 있다고 말해줬다. 그러자 한국군은 마을을 떠났다. 그들은 안토촌으로 방향을 잡고 갔다.”

과자와 사탕, 그리고 기관총과 수류탄

(사진/베트남전쟁 중 작전지역에 보급품을 공급하는 한국군. 한국군 작전과정중, 믿을 수 없는 잔혹한 일들이 일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몇번의 총성을 듣고서 아마 한국군이 게릴라들과 접전을 벌이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 접전이 한국군을 화나게 한 게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안토에서 그들은 7명의 아이와 1명의 노인을 지하 벙커로 몰아넣은 다음 수류탄을 던져넣었던 것이다. 5명은 죽었고, 3명이 다행히 살아남아 그 얘기를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그날 오후 디엔니엔 사람들은 한국군이 작전을 마칠 때까지 머무르려고 누이쫀으로 피난갔다. 하지만 50명 넘게, 100명 가까이 되는 여자들과 아이들은 그대로 마을에 있었다. 저녁 무렵 한국군이 안토에서 다시 돌아와 이 사람들을 모았다. 한국군은 아이들에게 과자와 사탕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기관총과 수류탄으로 그들을 모두 살해했다. 한국군들은 시체를 그대로 쌓아둔 채 마을을 떠났다.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사탕을 나눠준 것을 알게 된 것은 이틀 뒤 언덕에서 내려간 남자들이 죽은 아이들의 입과 손에 사탕이 물려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들은 것은 1972년 3월이었다. 베트남에 간 지 1년 반이 됐을 무렵이다. 한동안 우리는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에 대한 보고가 불확실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안하이의 얘기를 들은 뒤 우리는 좀더 조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1972년 5∼8월 사이 우리는 40차례 인터뷰를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쿠앙남, 쿠앙틴, 쿠앙응아이, 빈딘성의 작은 마을이나 피난민 캠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한두명과 인터뷰를 했지만 옆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설명과 보충 얘기가 덧붙여졌다. 9차례의 인터뷰는 쿠앙남의 피난민 캠프에서 이루어졌는데 같은 마을에서 온 10명 이상의 사람들이 증언을 해줬다.

우리는 쿠앙남, 쿠앙틴, 쿠앙응아이성을 조사하는 데 주력했다. 1966년 중반부터 1971년까지 청룡부대가 작전을 수행했던 곳이다. 빈딘에는 가끔 들렀는데 그곳에 주둔했던 한국군의 양민학살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둘 모두 베트남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에 인터뷰 내내 우리는 통역의 도움이 필요없었다. 다행이 우리는 종교지도자들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는데 그들의 도움 덕분에 많은 시골 사람들과 얘기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가까이 가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고, 드러내놓고 외국인과 얘기하는 것을 꺼려한 그들의 말문을 열게 하는 것도 힘들었을 것이다. 거의 모든 경우에 인터뷰를 한 사람들은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던 마을이나 동네의 주민이었다. 몇몇 다른 경우, 우리에게 정보를 준 사람들에 따르면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의 진술이기도 하다. 종종 그들은 학살의 현장에서 다행히 도망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정부와도 관계가 없으며 다만 그들의 얘기를 보도용으로 쓰려고 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전까지는 얘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비록 우리가 인터뷰하기 3∼6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었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사이공 정부의 보복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우리와 얘기하는 것을 피했다.

‘학살 날짜’ 음력으로 정확히 기억

한국군에 대한 얘기를 추적하는 데 우리가 맞닥뜨린 또 다른 어려움은 공교롭게도 한국군이 ‘평정한’ 지역 가운데 많은 곳이 다시 1972년 여름께 ‘위험지역’이 됐다는 사실이다. 쿠앙응아이, 쿠앙틴 그리고 빈딘성은 우리가 들었던 대학살이 일어난 지역인데도 방문하기에 불가능한 곳이 됐다. 이 지방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얘기들은 지금은 도시에 나와 살거나 1번 도로를 따라 있는 캠프에 거주하고 있는 피난민들한테서 들은 것이다. 쿠앙남에서 우리는 사이공 정부가 ‘귀향마을’로 정해 많은 피난민들을 한 곳으로 정착시킨 곳을 방문할 수 있었다. 한국 해병이 작전을 수행한 이 지역의 다른 곳은 위험지역이어서 방문할 수 없었다.

사람들과 얘기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지역적인 문제와 같은 어려움들은 우리가 조사를 벌이는 데 상당한 제한이 됐다. 제한된 지역과 제한된 시간 안에서 우리가 최대한으로 들을 수 있었던 사실이 나타내는 것은 아마도 더 많은 학살사건이 한국군에 의해 이뤄졌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 사건이 일어났던 지역 밖은 모르는 채로 남아 있다.

자료를 모으려 애쓰면서 다행스러웠던 점은 우리가 만났던 사람들이 대부분 학살이 이루어졌던 날짜를 음력으로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족 가운데 죽은 사람을 위해 해마다 제사를 드리는 베트남 전통 때문이었다. 친척 가운데 죽은 사람이 없을 경우 대강 어느 해 몇월이라거나 어떤 시간이었는가를 대답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정확한 날짜나 달을 기억하는 사람도 가끔 몇년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는 대학살이나 잔학행위들이 어떻게 사람들 사이에 전혀 알려지지 않을 수 있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가 조사하고 있는 이런 상세한 사건들이란 결국 우리가 만나보았던 사람들에게는 전쟁이 가져다준 대량파괴나 피해의 한 요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경우 이들은 자신들이 살던 마을에 가해진 폭격이나 공격으로 우리에게 들려주었던 대학살보다도 더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바로 이점 때문에 우리에게는 잔혹하고 믿을 수 없을 만한 사건들이지만 그들에게는 특별히 주목할 이유가 아닌 것이었다. 아니면 베트남 농촌지역민들한테는 너무나 오랫동안 ‘일상적인 일’로 돼온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농촌지역 주민들로부터 사건을 들은 뒤 우리는 미국군과 한국군 군사 정보기관에 한국군의 작전이 있었던 날짜와 장소, 그 결과에 대한 정보를 요청했다. 하지만 어느 쪽도 우리에게 유용한 정보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당국이 한국군이 저지른 잔학행위에 대해 간과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있다. 쿠앙남성의 성도인 호이안에 있는 미국 고문관의 본부에 쿠앙남에서의 한국군 만행을 다룬 보고서가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 정보를 통해 들었다. 베트남에 있었던 한 미국 외교관은 이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으며 미국 정부가 조직적으로 이런 보고와 다른 미국 동맹군이 저지른 잔학행위를 무시해 왔다고 덧붙였다.

우리가 다음 이야기들을 하려는 목적은 어떤 사건이 언제 정확히 일어났는가에 대한 절대적인 증거를 제공하려는 게 아니다. 어떤 날짜들은 틀렸을 수도 있고 어떤 자세한 부분에 대한 설명은 잘못됐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얘기들에 대한 독립된 정보와 그 숫자들은 베트남에서 한국군들이 어떻게 이용됐는가에 대한 신빙성 있는 사실을 제공하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베트남 농민들이 우리에게 해준 얘기들이다. 그들이 직접 겪거나 가족이나 친구들이 겪은 ‘한국군이라 불린 동맹군’이 수행한 ‘평정’에 대한 얘기이다. (다음호에 계속)

한겨레21 2000년 02월 03일 제2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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